The Gates of Citizen
2015
4 shipping containers, 1 speaker set, sound installation

만남과 이별의 방송국

아트 인 컬쳐 임민욱 인터뷰
채연 기자

1. 이번 전시는 작가의 ‘세미 회고전’으로 열렸다.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4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이 한 공간에서 전시 중이다. 전시의 막바지를 향해 가는 시점에서 이번 ‘세미 회고전’을 치러 내는 소감이 궁금하다.

내게 들이닥쳤던 그 이미지들을 계속 질문하고 살아내야 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내 작업의 근원으로 이해하게 된 어떤 죽음들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 그것이 우연의 일치였다 해도 피하지 않고 대면하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다. 쌓아두지 않고 다 꺼내고 싶었다. 말하자면 뭘 정리해보겠다는 착각은 버리기로 하고 그냥 더 밀어 부쳐서 곤경을 확장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궁극적으로 어떤 충동에 사로 잡히는 전시를 보고 싶었다. 작업들 속의 무수한 사건들이 정말 히드라 머리들 같이 나타나서 말을 걸었다. 세미라고 하든 회고전이든 우열과 선점의 논리 위에 내놓고 증명하는 자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2. 각 출품작이 모여서 하나의 큰 작품을 이룬다는 인상이 짙다. 한국 근대사의 아픔들을 은유적으로 감싸 안는다는 공통점이 엿보인다. 주요 테마는 분단과 이산이다. 같은 테마를 가지고 광주비엔날레(2014)와 리얼DMZ프로젝트(2015)에서 풀어낸 작업들을 이번 전시에도 들여 왔다. 같은 테마이더라도 야외 공간에서 진행했던 작업을 시내 중심의 대형 미술관 화이트큐브 공간 안에 구현할 때는 굉장히 다르게 접근해야 했을 듯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점을 둔 요소는 무엇인가?

관계 혹은 기운의 수묵화 같은 거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것은 특정 테마가 아닌 파편의 근원에 있는 공포의 형태다. 있는 그림 버리기. 없는 그림 찾아가기. 그런 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나 지리적 통일 염원과 상관없다. 오히려 사적이고 환상적인 세계에 더 가깝다. 내가 겪은 일이 아닌데 왜 아프냐는 질문에서 비롯한 거다. 누구나 살면서 무언가를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을 겪고 또 누구는 도망쳐야만 살 수 있는 곡절들이 있다. 그런데 의지와 상관없이 그냥 뒤집어쓴 혐의들이 있다. 또 우연과 실수가 인생을 끌고 다니고 좌우하게 만든다. 그 때 어떤 촉수가 삶을 거느린다. 거기서 시작된 발견들이 이리저리 퍼즐을 질질 끌고 다니고 삶의 주변을 갉아 먹는다. 그게 드로잉이 되고 ‘주사위 던지기는 우연을 폐기하지 않는’ 그림이 된다. 그래서 <동굴>이란 제목을 붙인 제 1 전시장은 미래이자 병원이고 심장이자 죽음이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분단과 이산이라는 ‘테마’를 가져와 작업하지 않았다. 분단국가에서 미술이란 무엇인가, 흩어진 공동체는 어디에 거주하는가 그런 질문들이 간단한 테마 선택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픔을 감싸안는다’는 그런 말들로 건너뛰면 결국 결과적 위치나 구도부터 떠오르게 한다. 연대가 상품화로 유통된 시대에 작업 그 자체를 어떤 목적으로 축소시키는 시도들이 범람하고 있고 작업보다 생각을 과하게 혹은 덜하게 만드는 이런 수식어들에 문제가 있다.

3. 신작 <만일의 약속>은 이번 전시의 핵심적인 요소로 보인다. ‘미디어’를 다루는 작가가 전시장에 재현한 ‘극장’에서 이 다큐 영상들은 어떤 역할을 하도록 구성하였는가?

미디어는 언제 찌꺼기를 남기는가. 잔상은 언제 입체가 되는가. 혹은 입체는 영원한 잔상일 수 밖에 없는가. 그리고 물질계로 돌아서거나 상상계로 돌아가는, 그 순간의 회전축 혹은 척추뼈 같은 화면의 역할을 생각해 보았다. 생사를 모르고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혈육을 찾겠다고 미디어 현장을 점령 했을 때 벌어진 아수라장은 평면에서 입체까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시각적 도구가 사연판이 된 각축장이었다. 사연판은 선명해야 했고 직접적이어야 했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른다는 사실의 물음표와 함께 거기엔 또 다른 찢김, 원망과 희망, 그리고 긴장과 실망이 말 할 수 없는 도장을 찍는 또 다른 입체적인 그림을 그려냈다.
하지만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도 시간의 중력 속에서 초기와 후기가 다른 양상을 전개하며 나갔다. 포개진 공동체는 극적 효과를 유지하려는 미디어 앞에서 기이한 삼각관계에 놓여 있었다. 전시장도 몽타쥬의 공간이고 이야기가 흐르며 퍼포먼스를 경험하는 곳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 미디어 이벤트를 어떻게든 반추해 보고 싶었다. 그 때 만행과 저항, 충돌과 긴장, 혹은 회복과 혐오가 <만일의 약속> 속에서 고스란히 불거져 어디론가 비춰나가길 바랬다.

4. <통일 등고선>의 경우에는 초기작부터 최근까지 발표한 영상 작업 9점이 작품 주변을 둘러싸고 일종의 소품처럼 설치됐다. 사운드가 제거된 상태로 반복되는 이러한 영상 설치의 이유는 무엇인가?

전시장은 계를 달리하는 방송국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동굴>이라 이름붙인 그 방은 상황실로 간주한 설치였다. 2012년 실제 뉴스룸을 방문했었다. 그 때 그 뉴스데스크 옆 방의 상황실 풍경과 소리가 인상적이었다. 한마디로 고요했다. 재난의 이미지가 흘러가고 수족관 속에서 벙긋거리듯 뭐라고 뭐라고 외쳐대고 수십 개의 채널에서 드라마와 코메디가 떠있는데 간간히 큐시트만 쳐다보는 피디가 눈에 들어왔다. <허공에의 질주> 상황실과 조종실 현장을 구현해보려고 했는데 똑같이는 못해도 원칙은 그런 것이었다. 오브제 작업들이 상황실 버튼처럼 붙어있고 영상은 동굴 ‘바깥’ 채널, 포터블 키퍼는 유리피복을 입은 피디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그런 식이었다.

5. 컨테이너 박스로 된 <시민의 문>은 로댕의 지옥문과 조응하는 세련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여기서 흘러나오던 다소 활기찬 인상의 음악은 전시 전반에서 느껴진 ‘애도’의 정서와 다소 부딪히면서 또 다른 감정을 생성한다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 관객들에게 어떠한 감정을 선사하고 싶었던 것인지 궁금하다.

내 작업에서는 이것이다 싶으면 외면하고 그게 아니야 하면서 가지를 뻗어나가는 모순의 성장 같은 것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관객의 몫으로 남는 뒤끝작렬이랄까. 그것이 미디어의 폐허이건 애도이건 일관된 특정 정서를 일러스트 하는 작가는 되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어떤 감정을 선사하고 싶은지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이룰 수 없는 정서를 가장 염두에 둔다.

6. <허공에의 질주>에서는 토템과 같은 형상을 한 조각들이 특히 눈에 띈다. 각각에 쓰인 재료도 다양하다. 이 ‘토템’의 재료 및 형태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구성하였는가?

가령, 어떤 일이 벌어졌는데 난 거기에 없었고 기억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 이건 아주 불합리하다. 사방에서 네 할일이나 하라는데도 나를 물고 늘어진다. 피할 수 가 없다. 정치, 사회, 학교, 친구, 가족, 곳곳이 다 중첩돼 있다. 정보와 생각은 예술을 죽인다. 그래서 도망치자고, 달리자고 결심했다. 작은 것들에만 일희일비하고 믿으려고 했다. 그게 미술인 것 같다. 주술사라도 된 심정으로 작업실 옆의 중부시장에 간다. 우뭇가사리랑 엄나무 가시, 댕기머리 등을 사서 검은 봉투에 들고 온다. 그리고 화물신앙을 가진 원주민들처럼 해본다. 그들은 화물/사람 신이 도래할 장소를 만들고 거기서 신호를 보내거나 받기 위해 활주로를 만들고 관제탑과 비행기를 사탕수수로 만들었다. 나는 촬영현장을 흉내낸 조각적 오브제들을 만든다. 끊임없이 공적 공간으로 정보를 보내는 미디어들과 달리 하루 아침에 바뀐 세계에 사는 ‘몸’을 향해 주파수를 맞춘다. 타들어간 지팡이, 혹이 된 빛, 고체가 된 액체, 사슬이 된 가시등등… 계(界)를 달리하는 수신과 발신 장치들이 하루 아침에 만남과 이별의 장소로 변신하는 방송국 형태를 상상하고 조직했다.

7. 한편, 오래된 장판으로 이루어진 <옥상> <뉴타운 점선면>은 유기적인 형태를 갖추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모습의 다른 조각(<포터블 키퍼> <마디> <허공에의 질주> 연작)에 비해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환경’에 가까워 보인다. 이 장판은 어디로부터 어떻게 흘러 와서 전시장에 걸리게 되었는지, 제작 과정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환경이 사진이 될 때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2006년에 <퍼블릭 필링>이라는 제목으로 전봇대 스킨이나 맨홀 뚜껑같은 표면을 캐스팅하다가 아예 아스팔트, 콘크리트 바닥을 카펫트 마냥 라텍스로 떠내고 다닌 적이 있다. 그러면서 태양과 달이 찍히고 온도나 비바람이 현상하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며 좋아라 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연신내에 작업실이 있을 때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재래시장 옥상에 옥탑방이 있었던 건지, 버려진 장판들, 식기 몇 개, 막대기, 선풍기 날개 (이런 곳엔 꼭 버려진 환풍기나 선풍기 날개가 있다…)를 주워 와서 포터블 키퍼도 만들고 장판도 보관해 두었다. 왜냐하면 비우라고 하면 언제든 떠나야 하는 임시 작업실이어서 그랬는지 혹은 점점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는 뉴타운 건설현장의 고공 크레인 때문이였는지 그 시장도 사라질 것 같았고, 나도 사라지는 방식으로 택한 아카이브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내 나름의 운동기록 사진이다.

8.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사회의 압력에 희생당하는 일반 시민의 모습을 꾸준히 형상화해 왔다.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민중’이란 무엇일까?

쉽게 말하자면 ‘아트인컬쳐’를 모르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트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아니다. 지금 누가 일상에서 우리 ‘민중’이라는 말을 사용하겠는가. 그들은 지식인들이 논의를 위해 일체화시키는 자기기만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렇다고 해서 민중이란 말을 못부를 것은 또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에서 상정된 ‘민중’처럼 ‘사회의 압력에 희생당하는 일반 시민의 모습을 형상화’ 해오지 않았다. 누군가를 민중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폭력의 희생자들이, 피해자들이 특정한 자기 의식을 가져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반 시민들’과 ‘피해자’들은 자신을 민중이라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여기서 ‘민중’상을 다시 그려본다면 누구나 희생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가해자도 되는 시민상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로서 나의 ‘민중’상은 하나의 기준과 생각만을 강요하는 이 곳에서 배제당하는 사람들, 어떤 기준이나 집합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 작품의 무대는 한국이지만, 작가가 다루고 있는 개인과 사회의 충돌에 대한 문제는 글로벌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 근대사의 특정 사건이나 한국의 특정 장소를 두고 만들었을 때 해외의 관객들은 이 낯설음을 어떻게 타파할 수 있을까? 관련하여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다면?

지금 국립현대 미술관 서울관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작가 윌리엄 켄트리지의 전시가 있다. 전시장 입구는 그 작가의 국가 역사와 맥락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안으로 안내되고 있었다. 그의 작업을 두고 너무 자신의 국가에 대해 특정적이며 직접적이라고 비난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독일에서 개인전을 했을 때 일간지들이 소개한 기사를 보며 내 작업에 대한 그들의 관심에 역으로 느낀 낯설음이 떠오른다. 그들의 역사인식은 단호하게 느껴졌다. 지금 그 해외 관객이 낯설어 할 것은 아마 한국의 국가정상이 역사적 사실을 두고 일본과 협상을 하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이제 내가 질문에서 낯설어하는 것을 토로해보고 싶다. 오히려 과도하게 미리 결정된 저 미술의 타당한 장소, 보편적 대중/관객은 누구인지 그것은 왜 두렵지 않은가.

2016년 10월 영어번역을 위해 수정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