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만보’ 그리고 ‘정치적인 것’의 충격: 임민욱
김남수, 무용평론가
매거진 한국연극 리뷰
스펙타클은, 역사와 기억을 마비시키는 현존하는 사회조직으로서, 역사적 시간이라는 토대 위에 건설된, 역사를 포기하는 현존하는 사회조직으로서, 허위적인 시간의식이다.
-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158번 테제
우리는 임민욱의 S.O.S-채택된 불일치 (3월 29일 한강)를 통해 서울이라는 세계를 하나의 자연(physis)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병풍처럼 둘러싼 아파트 군락, 강과 물결, 불도저를 비롯한 중장비, 뚝섬의 새떼들의 목소리, 신념과 얼굴을 맞바꾼 운동가의 모르스 부호를 만날 수 있었다. 이미 이 자연은 인간과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자연이며, 역사적 구성체로서의 자연이다. 그러한 장면들의 지평에는 무엇인가가 ‘삼국유사’나 ‘허균’처럼 나타날 것이다. 서울시장이 디자인하고 대통령이 운하로 연결하려는 거대하고 도저한 강은 ‘유령(귀신)적인 것’을 불러내어 신선한 정치적 충격을 주고 있다.
시작은 작은 기계적(machinic) 변환이었다. ‘유람’을 ‘만보’로 변환하면서 밤의 한강을 떠도는 유람선의 ‘시선’은 곧 시간의 벽을 허물고 상류로 올라갔다. 이는 마술적인 감각이었다. 발터 벤야민이 1930년대 파리 아케이드 공간에서 길잃고 적극적으로(!) 헤매던 소위 파사주 감각이 나타났다. '만보'는 자본주의 도시의 환등상에 매혹되거나(씨줄) 환멸을 느끼는(날줄) 동시적 감각의 행위이다. 여기서는 ‘거리’ 대신에 ‘강’인 셈이다. 임민욱은 파사주의 밀실공포나 파노라마적 전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 역습을 진행한 것이다.
공연은 여러가지로 복합적이었다. 여의도 선착장을 떠나자마자 유람선은 몇 가지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먼저 ‘시선’의 탄생. 뱃전 내부 공간은 프로시니엄 극장과 비슷한 프레임 구조를 가졌으며, 즉각 외부 공간을 하나의 ‘관람’ 대상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객석의 눈으로 서울을 ‘관람’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선장의 보이스오버는 그런 ‘시선’에다 한강이 급변(catastrophe)해온 시간적 차원을 검토하도록 자극했다. 수십년 재직해온 그는 개인사적/역사적 증언을 곁들인 언어를 통해 포스트드라마의 진실을 끊임없이 되먹임시켰다. 보이스오버 자체가 감동적인 ‘한강-되기’였다. 우울과 유머 그리고 서투름의 정감이 가득한 언어, 그것은 한강이 스스로 자신에 대해 말하는 차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강가에는 여러 ‘유령(귀신)적인 것’의 귀환 현상이 퍼포먼스로 나타났다. 먼저 배의 서치라이트 자체가 전망좋은 아파트들을 불빛으로 공격했으며, 어디선가 나타난 일종의 이교도 난장극은 “이름없는 것들을 내버려둬라” 라고 마니페스토(선언) 타입으로 울려퍼졌고, 어둠만이 신념의 외투 노릇을 하게 된 비전향자의 목소리와 신호가 전달되었다. 혹은 뚝섬의 새떼들을 대신하여 사랑하는 남녀가 과거의 사랑 표현을 과잉으로 표현하였다. 이제 사라진 것들, 이제 소멸해야 하는 것들, 그리고 기억의 층위에서 비자발적으로 귀환하는 것들이 한강 유역의 경관 속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유람선의 바깥에는 끊임없이 주변을 돌고 있는 또 하나의 ‘시선’이 유람선의 ‘시선’이 도그마로 변할 수 있는 위험을 성찰하게 하면서 동시에 ‘시선’ 자체의 공격성을 섬뜩하게 드러냈다. 이는 규범을 결정하는 공론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여전히 근대적인 개발 공학만이 난무하며 한강 혹은 자연을 파괴하는 타입의 실용주의적 자본주의의 천국을 소극적으로(!) 타격하는 행위였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I would prefer not to.)
-허먼 멜빌, 『바틀비』 중에서
그러나 혁명의 꿈이 사라진 시대에 퍼포먼스/연극/춤이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논의가 이 선상에서 매우 활발하게 펼쳐졌음을 느낀다. 계몽의 습속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는 가장 소극적인 차원의 저항, 최저선의 저항이 어떻게 일파만파의 인지적 충격으로, 존재론적 충격으로 나아가는가를 맛보아야만 한다. S.O.S는 공간적 차원의 ‘만보’를 통해 시간적 차원의 ‘알레고리’를 표현하며 진전되었다. 알다시피 ‘알레고리’는 단편적인 것들을 통해 전체적인 것을 인식하는 엄밀한 방법이다. 그런 파장의 증폭에는 장영규의 사운드 아트가 타임 트랙을 타고 서울이라는 기존 ‘삶과 살의 강령’을 환기하거나 해체하는 힘이 매우 컸다. 역사적으로 구성된 서울,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미래주의적 파괴와 건설의 2박자를 무지막지하게 전개해온 서울, 생태적 민주적 보편적 공통감각의 위기를 맞은 서울이 그 사운드의 물질적 웨이브 속에서 크게 요동쳤다. ‘감응’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것’의 출현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임민욱의 S.O.S는 ‘기성품 언어’인 한강유람선을 유동하는 극장으로 만들어 서울을, 모더니티를, 현행하는 시간의 결을 느끼게 하는 퍼포먼스 공연이었다. 연극적 베이스를 가진 메타-드라마인 동시에 사운드 아트, 대지 미술 그리고 공공 예술 등등 폭넓은 범주 영역에 걸쳐 있는 문제적 작품이다. 그러므로 각 분야의 비평적 시각이 함께 ‘시선’의 연합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시선’의 조망이 조망 자체로 인해 ‘저항’이자 ‘실천’이자 ‘선언’이 되는 이 과정은 매우 놀라운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현행하는 시간의 흐름이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각성 그리고 그 흐름 아래 수축되어 있는 역사의 기억을 호출한다는 정치적 감각이 실재적으로 가득 차올랐던 것이다.
매거진 한국연극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