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욱, “경계에 살다” — 1

김홍희 (큐레이터, 서울시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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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민욱에게 예술이란 무엇일까? 아니 이 작가는 예술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떠올리는 까닭은 그의 예술이 통상적으로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영역에 비스듬히 걸쳐있거나 때로는 그곳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소위 정치예술의 맥락에서 작가는 지금/여기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일상적 삶에 개입한다. 특히 글로벌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형성, 발달된 금융 자본주의, 소비주의, 신도시개발, 관료주의, 개인주의의 폐해와 재앙에 주목하고, 관련 주제와 모티프를 대중매체와 하위문화로부터 도출한다.
그러나 임민욱은, 미술을 사회변혁, 이념구현을 위한 혁명적 도구로 사용했던 과거의 정치예술가들과는 달리, 미술적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정치예술의 미학화를 추구하는 한편, 끊임없는 회의와 자기성찰로 현대문명의 모순, 사회적 불화, 역사적 상실감, 잃어버린 기억, 인간소외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내면화한다. 무엇보다 작가는 인종, 환경, 젠더, 신체, 재현, 정체성, 주체성, 타자, 다문화 이슈에 타자애적 관심과 시선으로 접근한다. “너의 현실에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작가의 탄식 속에 타자와의 상호상생적, 관계지향적 연대감, 약자를 향한 포용과 희망이 깃들어 있다. 정치사회적 문제의식을 순화시키는 시적 감성, 사회적 분리와 괴리를 화해시키는 치유의 정서가 임민욱 탈정치 의지의 동인이 된다.
임민욱의 탈정치 의지는 예술과 정치, 공공의 역사와 개인사, 사회와 개체, 주체와 객체, 지성과 감성, 고급과 저급의 경계를 허무는, 또는 경계에 기거하는 이중적, 또는 양면가치적 미학과 맞닿아 있다. 그것은 개념의 유희로, 애매모호함의 함정으로 오도되기 보다는 타자적 시선과 구체적 명증으로 개방, 변혁의 의지를 담보하는 실천적 양면가치로서, 작가는 그것으로 모더니즘의 단일성, 전일성, 유일성에 도전하고, 개발주의로 성공신화를 만들어낸 동시대 부계담론에 일격을 가한다.
반모더니즘적이고 반부계적 함의를 갖는 임민욱의 양면가치 미학은 양식적으로는 비시각적 촉각성과 비고정적 액체성에 근간하고 있다. 페미니즘 비평의 시각에서 보면 촉각성/액체성은 시각성/고정성, 그리고 그것과 직결되는 모더니스트 남성성과 대립되는 여성적 속성이다. 하얀 잉크 같은 어머니 유액으로 글쓰기(엘렌 식수 Helen Cixous), 자궁처럼 촉각적이고 액체적이고 “각각 나누어질 수 없지만 이미 하나인” 이중적인 에로틱한 문체(뤼스 이리가리 Luce Irigaray)가 남성양식을 능가하고 전복하는 폭발적 힘을 갖는다는 프랑스 네오페미니스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듯이— 3, 임민욱은 액체적/촉각적 양식에서 사회적, 인간적 불화를 해빙하고 개발주의 병폐를 치유할 창조적 영감을 얻는다. 경화된 비활성적 고체보다 연성의 활성적인 액체, 시각적 거리보다는 촉각적 접촉이 인생의 따듯함을 충전시킬 회복의 에너지를 보전하고 있는 것이다.
액체적/촉각적 양식은 문법 이전의 상상계 언어처럼 비체계적이고 비가시적이다. 그것은 상징계의 규칙과 원칙의 굴레를 벗어나는, 부계적 언어로 오염되지 않은 원초적 양식으로 작가는 자신 특유의 건너뛰기식 발화 또는 생략과 비약의 수사학으로 그것을 구축한다. 양면가치 미학, 액체적/촉각적 양식, 비체계적 언어, 생략과 비약의 수사학이 모더니즘, 남성성, 상징계의 대척점에 있다는 맥락에서 임민욱 예술을 젠더정치학의 시각에서 독해할 가능성과 당위를 시사 받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과 당위는 단일한 하나, 하나의 음성을 거부하는 양면가치 미학으로 다시금 무화된다. 여성성과 초여성성, 젠더와 탈젠더의 양극을 왕래하며 결정론을 유보시키는 것이 경계에 사는 임민욱 예술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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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성, 액체성, 촉각성은 비디오의 매체적 속성이기도 하다. 비디오 이미지는 전자입자의 흐름으로 비고정적 액체성을 보유할 뿐 아니라 시간의 개입으로 2차원과 3차원 양자에 존재하는 모자이크적 질감을 획득한다. 또한 건너뛰기식 생략과 비약을 전제하는 테이프 편집으로 비체계적이고 비가시적인 비디오 언어가 창출된다. 이렇게 볼 때 작가가 2005년부터 자신의 주매체로 비디오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파악된다.
임민욱은 비디오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세계나 특정 사건이 아니라 연출된 퍼포먼스의 기록으로서 때로는 서사구조를 가진 ‘내러티브 다큐멘터리’, 때로는 시정을 담은 ‘포에틱 다큐멘터리’가 된다. 내러티브, 포에틱이라는 접두어가 시사하듯이, 그의 다큐멘터리는 객관과 주관, 공과 사, 역사와 자전, 현실과 허구의 양면을 수용하면서 담백하면서도 진한 감동을 자아낸다.
임민욱의 양식적 특성이 가장 뚜렷하게 명시되고 있는 작품이 순례형식 퍼포먼스의 다큐멘터리 비디오 The Weight of Hands(2010)이다. 곧 사라질 망각의 풍경, 파괴되고 금지된 장소, 작가가 말하듯 “이미 너무 늦어버린” 공간에 대한 액풀이 제식이듯, 한 사람의 드러머가 절두산 벼랑 밑 폐쇄된 유람선 선착장 공간, 미분양으로 유령처럼 텅 빈 파주 아파트 지대, 개발로 속살을 드러낸 한강유역 여주 이포보 등을 북을 치며 순례한다. 관광버스에서 내린 일군의 군중들도 순례에 합류하듯 어둠 속을 행진한다. 이들은 모두 비옷을 입고 있다. 버스 안에서는 승객들이 마이크를 잡고 흐느끼듯 이별을 노래하는 한 여인을 치켜든 손으로 옮겨가며 이동의 흐름을 만든다. 죽음, 또는 운구를 상징하듯 길게 누운 그녀의 몸은 마치 강물처럼, 빗물처럼, 눈물처럼 슬프게 흘러간다.

밤비, 달리는 관광버스, 드러머와 관광객의 순례, 노래하는 여인의 흐름은 이동, 유동, 운동의 과정과 에너지를 상장하는 액체적 이미지들이다. 작가는 적외선 열감지 카메라를 사용하여 축축한 액체 이미지에 온기와 훈기를 불어넣는다. 열, 온도, 체온이 대상을 포착하는 순간 이미지들이 ‘워밍’, ‘히팅’되어 실체감을 상실하고 환영적 비물질 이미지로 전환된다. 수채화같이 투명한 칼라, 흐느적거리는 형태들이 액체적 영상 효과를 배가시키는 동시에 손으로 만지고 싶은 접촉적, 촉각적 감흥을 유발시킨다.
비디오 이미지 자체가 모자이크적 질감을 담보하지만, 작가는 열감지 촬영을 통해 사실적 형상을 대신하는 추상적 색채와 질감으로 촉각성을 극대화시킨다. 제목이 말하는 ‘손의 무게’는 바로 눈이 아니라 손으로 감지하는 촉각의 무게로 독해된다. “sightseeing”(시각적 관광) 대신 “sight touching”(촉각적 관광)을 제안하는 작가 진술이 함의하듯이,— 4 그는 파괴의 홍역을 치루고 건설되는 시각적 볼거리를 만짐과 접촉으로 회복시키려고 한다. 임민욱은 건설의 손과 다른 또 하나의 손, 수치로 그 무게를 계량화할 수 없는 윤리적 손을 상정하는 것이다.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거창한 굴착기가 건설을 위한 파괴의 손이라면, 심약한 여인을 떠받치며 슬픔을 달래주는 승객들의 손은 구원과 치유의 손이다. 부계적 손질과 모계적 손길로 요약되는 이러한 손의 양극성, 그 차이가 시각과 촉각의 감각적 차이, 시각적 관광과 촉각적 관광의 지각적 차이를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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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무대로 펼친 유람선 퍼포먼스의 다큐멘터리 비디오 S.O.S. – Adoptive Dissensus(2009)는 실제로 시각적 관광을 촉각적 관광으로 전환시킨 관객참여 작품이다. 유람선에 탑승한 유료 관광객들이 한강변에서 벌어지는 3개의 단막극을 관람하는 극중 관객으로 초대된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일종의 액자소설처럼, 유람선 항해의 액자 속에 3개의 내부 이야기를 삽입하여 S.O.S.라는 외부 이야기를 다각적으로 전개한다. 작가는 가속화 되는 세계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시공간적 불일치, 개발 욕망과 어긋나는 불화, “이미 본 것 같고 벌써 사라진 것”에 대한 기억과 저항의 에피소드 3화를 채택하여 관람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관객들은 3에피소드의 상황과 기억을 공유하는 일시적 공동체가 되어 “어느덧 퍼포먼스의 주체가 되는 주객체 전도의, 뫼비우스의 띠를 경험”한다. — 5
첫째 에피소드는 개발지상주의에 맞서 “이름없는 장소”를 남겨달라는 젊은이들의 집단시위이고, 둘째는 사랑의 은둔처를 돌려달라는 두 연인의 드라마틱한 환송 이벤트, 셋째는 전향을 거부한 장기수의 외로운 독백이다. 이들은 거울로, 액션으로, 무전기로 조난 신호를 보내지만 그에 응답하는 유람선의 서치라이트는 도시의 파사드를 훑어낼 뿐이다. S.O.S. 구조는 실제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강 르네상스를 둘러싼 작가의 문제 제기는 유람선에 탑승한 관광객, 비디오를 관람하는 전시장의 관객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질문으로 남는다.
수상 퍼포먼스인 만큼 이 작품에서도 액체 이미지, 이동의 모티프가 주된 요소를 이룬다. 유람선은 물론 유람선에 탑승한 관광객 모두가 이동에 동참하고, 서치라이트 조명과 실시간 사운드가 선상 유람의 흥분과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The Weight of Hands에서 액체와 이동의 센세이션이 촉감적 영상으로 각성되었다면, 여기서는 사방위적 공감각 환경으로 촉발된다. 작가는 이러한 환경적 총체극의 작가이자 감독이 된다. 그리고 서울의 젖줄 한강과 유람선, 내부의 선장과 관객, 3에피소드가 펼쳐지는 외부 사이트의 주역들이 모두 배우이자 관객이 된다. 특정사이트에서 이틀간 실시간으로 진행된 이러한 대규모 집단 퍼포먼스에서는 개인적 비전보다는 공동체 의식과 협업이 중시되고, 우연과 사고를 동반하는 삶의 요소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결국 작가는 S.O.S. – Adoptive Dissensus에서 라이프 아트, 대중미학을 표방하고 예술과 삶, 예술과 대중 같은 화합하기 어려운 불일치의 통합을 시도함으로써 다른 층위의 뫼비우스의 띠를 제안하는 것이다.
전술한 두 작품에서 보았듯이, 빗물, 강물은 임민욱의 액체적/촉각적 양식을 대변하는 상징적 주제이자 모티프이다. 더구나 물은 이질적인 물성들을 하나로 용해시키는 수용성의 매체로서 작가에게 ‘마블링’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혼합기법을 발상시킨 점에서 재료적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물과 안료가 만나 자발적으로 만들어내는 패턴과 질감이 뜻밖의 조형적 하이브리드를 창출하게 되는 마블링은 그것이 액체적 비고정성을 가시화 시켜주는 점에서, 또한 불화를 화합으로 일궈내는 순간적 접촉의 결과물이라는 맥락에서 임민욱의 액체적/촉각적 양식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비 오는 날 자동차 지붕 위에 안료를 뿌리고 도로를 질주하면서 안료가 빗물에 녹아 내리게 한 극단적 마블링 퍼포먼스를 수행하였다. 또는 웅덩이 고인 물에 안료를 풀어 마블링 캔버스를 만들고 그 위에 폐기된 필기도구 묶음을 수직으로 꽂아 가상의 미니어쳐 New Hometown을 세웠다. 비오는 날의 드라이브 퍼포먼스와 웅덩이 현장설치는 To No Longer Tell the End of the Rainy Season(2008) 연작의 일환으로 기록 사진과 잉크젯 프린트로 발표되었다. 연작 제목이 시사하듯이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장마, 홍수로 유추되는 과잉과대 현상, 끝없는 성장 욕망, 고속발전 이데올로기를 고발하는 동시에 마블링 혼합기법으로 요약되는 나와 타자의 소통, 연결, 화합을 기원한다.
마블링은 주로 예술과 외부자연/자연현상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데, 작가가 즐겨하는 라텍스 작업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건물 옥상이나 땅바닥 표면에 액체 상태의 라텍스를 뿌리고 수개월을 햇볕, 바람, 눈, 비에 노출시키면서 물성을 고체화시키는 라텍스 작업 역시 액체의 경질화로 특정 질감을 생성시키는 액체적/촉각적 작업이다. 마블링이나 라텍스의 의미는 이렇게 양자가 모두 물리적 접촉의 결과물로서 자연현상의 지표적 흔적이라는 점에서 찾아진다. 사진, 비디오와 같이 촬영 대상과 이미지가 일치하는 지표예술(index art)에서는 모방적 재현 대신에 물리적 흔적이 제시된다. 이미 “너무 늦은 공간”이 되어버린, 그래서 기억이 요구되는 재개발 지대, 그 파괴의 흔적과 재건설의 과정을 시각보다는 작가 특유의 촉각적/액체적 감성으로 기록한 내러티브/포에틱 다큐멘터리 비디오는 이런 점에서 동일한 감성과 상상력으로 발상된 마블링과 라텍스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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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Portable Keeper, 2005년의 New Town Ghost는 영등포 재개발 지구를 배경으로 연출한 퍼포먼스 다큐멘터리 비디오이다. Portable Keeper에서는 버려진 필기도구, 새 깃털, 인조모피, 선풍기 날개를 묶어 만든 기이한 막대형 오브제를 어깨에 멘 한 청년이 뉴타운 계획으로 폐허가 되거나 공사장으로 변모한 시장터와 시가지 주위를 배회한다. 그가 메고 있는 오브제는 무기나 주술적 오브제를 연상시키지만 그는 무사나 제사장과는 전혀 다른 무기력한 모습이다. 그것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능도 용도도 없는 그 오브제와 그 오브제의 운송자는 회복할 수 없이 “너무 늦어버린 공간”에 대한 탄식과 포기를 표상하는 듯 하다.
New Town Ghost에서는 랩퍼와 드러머로 구성된 2인조 길거리 연주단이 이동무대 트럭을 타고 번잡한 영등포 시장 일대를 돌며 개발주의에 대한 저항과 포기를 노래한다. 쇼트컷의 여성 랩퍼는 건설, 번영, 진보 이데올로기를 풍자하는 작가의 텍스트를 힘차게 낭송하며 토지자본주의, 개발지상주의라는 실체 없는 유령의 강림을 고지한다. 인디밴드 뮤직비디오 또는 떠들썩하고 들뜬 선거 캠페인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퍼포먼스는 작가의 집과 사무실이 있던 동네 구역을 순회하며 이루어졌다. 4년 후 Portable Keeper의 배경이 되는 폐허 같은 광경과는 대조적으로, 이곳은 아직까지 즐비한 거리 간판과 활보하는 행인들의 모습이 보이는 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비춰진다.
자신과 이웃의 기억을 담고 있는 장소특정적인 이 두 작품의 비디오를 통해 작가는 구 서울 공산품의 중심지에서 현재 뉴타운으로 변모하는 영등포의 재개발 과정, 그리고 그곳 주민들의 희망과 회한, 저항과 순응의 엇갈린 심상을 그리고 있다. 큰소리로 낭송하는 랩퍼가 개발의 망령을 예고했다면, 말없는 포터블 키퍼는 올드타운의 최후의 목격자로서 상실된 기억을 전수하고자 한다.
한국 재개발의 역사와 개인사가 병치되는 상기 두 작품에서도 드러났듯이, 임민욱의 작업은 대부분 개인적이고 일상적 경험에서 비롯된다. 2008년 4회 다문화축제를 작가의 시선으로 기록, 편집한 Game of 20 Questions: The Sound of Monsoon Goblin Crossing a Shallow Stream역시 자전적 참조에서 출발한 다큐멘터리 비디오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페미니즘 구호를 확인시키듯, 작가는 프랑스계 혼혈의 딸을 둔 소수파 가족의 입장에서 다문화 담론의 허와 실, 특히 ‘코시안’이라는 호칭에 내재된 인종 차별의 문제를 통찰하고, 글로벌 시대 현대한국의 새로운 사회현상, 새로운 공동체로 등장하고 있는 다문화 가정의 탄생을 타자애적 시선으로 직시한다.
2채널 비디오 Wrong Question(2006) 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고속 경제성장을 칭송하는 어느 택시 기사의 웅변조 독백이 건설현장, 데모장면, 고속도로 등 익숙한 도시 이미지에 ‘보이스오버’로 들린다. 여기에 Game of 20 Questions: The Sound of Monsoon Goblin Crossing a Shallow Stream에서도 얼굴을 보인 작가의 딸이 한국말로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네는 일상적 모습과 음성이 교차된다. 이미지와 소리를 불일치 시키는 보이스오버 수법이 암시하듯, “잘못된 질문의 올바른 대답은 이미지와 소리의 부합이 아닌 오히려 그 서로의 거리 두기에 남겨져 있는 것에서” 찾아진다.— 6 요컨대 일치, 동일화로 귀결되는 좌우, 신구, 동서의 이분법적 대립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는 상생적 태도가 올바른 해답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념과 다른 상상력의 역할이자 정치와 다른 예술의 힘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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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에르메스 미술상 수상 전시 Too Early or Too Late Atelier에서 작가는 상상력과 예술이 어떻게 이념과 정치를 극복하고 다양성과 차이를 수용하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땅바닥을 떠서 만든 라텍스 카펫, 천정에 매달린 퀼트 자동차 커버, 변형된 냉장고 등 일련의 오브제 설치작업이 현대 도시적 삶과 일상경험에 대한 개인적 반응을 표출한다면, 비디오 출품작 The First Impression of the Second Edition에서는 “내 이름은 아이엔지”라고 끝을 맺는 충무로 제본공을 통해 항상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는 진행형의 잠재력을 강조한다. Too Early or Too Late Atelier의 의미는 “과거와 함께 일그러진 관계 속에서 다형적이고 복합적인 세계들을 열고 거기서 또 다른 실천의 가능성”을 찾는데 있다. — 7
2006년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Original Live Club-Women’s Only Space은 부계적으로 형성된 글로벌리즘, 제도화된 비엔날레에 대한 자율적 대안을 제시한다. 여성에게만 관람이 허용된 이 공간의 입구에서는 남성전용클럽에서 유통되고 있는 여성이미지를 상영하고, 경제지와 포르노 잡지가 비치된 내부에서는 여성 관객들이 자신의 신체부위를 복사하는 참여적 액티비티가 권유된다. 공간내부의 은밀한 이야기가 남성들에게는 여성 참여자의 경험담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과정에서 여성의 성이 신비화되고 정보가 왜곡되거나 누락된다. 작가는 젠더특정적인 공간 설정을 통해 기존 미술 제도의 위계, 전시문화, 관람행태, 소통의 질서를 전복시킨다. “일그러진” 비엔날레의 “또 다른 실천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 이 작품이 발상되었다면, 제목이 “너무 늦은 혹은 너무 이른 광주비엔날레”로 명명되어도 무방하리라.

2008년 아트선재에서의 전시 «Jump Cut»에서도 “즉흥과 우연적 만남, 일시적 관계 속에서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시차의 비극이 아닌 또 다른 운동성을 보게 한다.”— 8 여기의 운동성은 물, 비, 흐름, 자연 현상으로 인한 마블링, 즉 이질 요소의 순간적 만남의 우연적 작용을 가리킨다. 작가는 마블링 퍼포먼스를 위해 우천 속을 드라이브 했던 구식 그랜저 자동차를 전시장 내부로 옮겨와 이라는 이름의 분수로 변신시켰다. 풍요와 부귀와 권위의 상징인 그랜저와 한강의 기적을 물의 모뉴먼트로 액화, 무효화시킴으로써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일그러진” 한강의 르네상스를 풍자하는 것이다.
«Jump Cut»전시에는 같은 이름의 비디오 작품, Andrei Tarkovsky ‘Offret-Sacrificatio’ - Jump Cut(2008)이 출품되어 눈길을 끌었다. 이 비디오는 다큐멘터리와는 달리,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장편영화 <희생>(1986)을 8분으로 압축 편집한, 영화용어로는 점프컷한 싱글 채널 비디오이다. 장면의 급전환으로 스토리 라인이 훼손되지만 그 대신 보는 이의 연상과 상상력이 발동된다. 작가는 잘려지고, 생략되고, 비약된 부분들, 작품이 되기 위해 희생된 부분을 관객의 몫으로 돌려준다. 관객의 개입을 요구하는 쌍방형 관람은 점프컷과 같이 비가시적이고 비체계적인 언어로, 다시 말해 생략과 비약의 수사학으로 이루어진 바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작가는 세기적 거장의 영화를 점프컷으로 희생시킴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근대화의 성장통을 위해 받쳐진 희생을 기억시키고, 나아가 세상의 구원과 인류의 발전을 위한 진정한 희생의 의미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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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민욱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더욱 난해하게 만드는 점프컷으로 자신의 난해한 작품세계를 대변하고 그 당위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양면가치 미학, 액체적/촉각적 양식, 비체계적/비가시적 언어를 구사하는 임민욱의 비디오는 리얼리즘, 대중기호, 상업주의를 멀리하는 예술영화를 지향하면서도 관객을 위한 상호텍스트적 영화 만들기를 고집한 시네아티스트 타르코프스키와 닮은 점이 많다. 그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젠더, 윤리에 관해 임민욱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과 실천적 액티비즘은 비판적, 민주적 시각에서 권위와 맞서고 자기성찰과 인류애로 과거의 기억과 향수, 희생으로 가능한 미래의 희망에 대해 말하는 그 시네아티스트의 발언에 비견될 만하다.
임민욱의 문제의식과 액티비즘은 이미 경력 초기부터 예견되었다. 1995년 파리 보자르를 졸업하고 1997년 현지에서 만난 프레드릭 미숑(Frederic Michon) 등 7인의 급진적 아티스트들과 조직한 ‘제너럴 지니어스’ 그룹활동, 1998년 귀국 후 200l년 다시 파리로 돌아가기까지 보여준 왕성한 전시 활동을 통해 작가는 미술관 문화나 전시관행에 맞서 과정적 현장 작업으로 오브제 전시를 대치하는, 다시 말해 전시 자체가 작품이 되는 진취적이고 대안적 프로젝트로 주목을 끌었다. 1999년 문예진흥위원회 아르코미술관 «신세대 흐름»전에 발표한 Social Meat는 미술관 자료창고를 전시실로 개방하거나 전시장을 산토끼 사육장으로 만들어 버린 도발적 발상으로 그를 일약 신세대 ‘앙팡테리블’로 부각시킨 문제작이었다.
2004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임민욱은 프레드릭 미숑과 함께 2000년부터 진행해온 ‘피진기록’의 후신 ‘피진 콜렉티브’(Pidgin Collective)를 결성하고 대안적 액티비즘을 본격화한다. “예술계라는 하나의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내부에서 상황을 교란시킬 새로운 상황을 창조”한다는 취지가 밝히듯,— 9 또한 피진이라는 용어가 함의하듯, 피진콜렉티브는 협업, 공동체를 선호하고 비체계적이고 일시적이고 과정적인 개방형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그런 만큼 예술적 순수성보다는 일상성과 하위문화에 주목하고 그로부터 소통적, 참여적, 대화적 창조력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대안학교 하자센터와 함께 2004-2006년 사이 진행한 일련의 는 정치사회적 현실과 괴리되지 않는 새로운 예술운동집단을 창출하고 청년문화의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기 위한 능동적 아카이브였다.
넓게는 한국현대사회의 정치사회적 모순, 좁게는 신도시 개발주의, 때로는 미술제도를 비판하며 치유적 대안을 제시하는 임민욱의 작품세계는 정치적 문제 의식과 개입적 액티비즘을 예술적 창의력, 인문학적 성찰, 문학적 감성으로 절제, 정제시킨 미학적 기초 위에서 형성되었다. 작가는 정치와 미학의 경계지대에서 지적 회의와 윤리적 머뭇거림으로, 점프컷적 생략의 감수성으로 자칫하면 선언적이고 계몽적일 수 있는 정치적 신념과 단언적 발언을 유보한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바틀비 Bartleby>의 주인공 바틀비의 분신답게,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으려 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고 있는” 지금/여기의 바틀비처럼, 임민욱은 “확신에 가득 차 대답하기보다는 망설이고 뒤돌아보며 재차 스스로에게” 자문하며 자신의 저항과 거부를 “일시적 떨림, 망설임, 헛소리, 중얼거림”의 수사로 전환시킨다.— 10 이것이 경계에 살고 있는 임민욱의 초상이자 탈경계 양면가치 미학에 기초한 그의 예술의 현주소이다.

— 1 본 제목은 자크 데리다의 논고 Living On/Border Lines, translated by James Hulbert, in Deconstructionism and Criticism, edited by Harold Bloom et al., New York: Seabury Press, 1979, pp. 75-176를 인용하였다.
— 2 Works, www.minouklim.com
— 3 Chris Weeden, Feminist Practice and Poststructralist Theory, Oxford: Basil Blackwell, 1978, pp. 65-68, Luce Irigaray, This sex which is not one, 1977, translated by Cathrine Porter,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85.
— 4 “관광으로 번역되는 ‘Sightseeing’은 ‘Sight Touching’으로 제안되고 퍼포먼스 기록영상은 온도와 무게를 감지시키는 매체가 된다.” Works, www.minouklim.com
— 5 임민욱, S.O.S. – Adoptive Dissensus – 내 안의 바틀비(Bartleby in Myself)(2009), 에르메스 재단미술상 도록, 2009, p. 154.
— 6 Works, www.minouklim.com
— 7 Exhibitions, www.minouklim.com
— 8 Exhibitions, www.minouklim.com
— 9 이영욱, <너무나 늦은 혹은 너무나 이른, 미술, 점프컷>, 아트선재 전시 도록, 2008. p. 89.
— 10 임민욱, S.O.S. – Adoptive Dissensus – 내 안의 바틀비, 앞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