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와 한국 현대미술 1

문영민 (작가, 미술비평, 메사추세츠 주립대 교수)

열댓 명의 사람들이 철조망 앞에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다. 몇몇은 페트병, 젓가락, 고무줄 등의 일상적인 재료를 이용해서 원시적인 방식으로 작동되는 작은 비행물체들을 만들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비행물체에 장착될 빈 계란 껍질에 클로버 씨앗을 버무린 빨간 액체를 채워넣고 있고, 또 다른 이들은 비행물체의 날개에 그 액체를 바르기도 한다. 이들은 몇 번이고 철조망 너머로 비행물체들을 날려보내려는 시도를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진기 삼발이 위에 액자를 불안정하게 부착한 새총과 같은 구조물로 씨앗이 담긴 계란 폭탄을 날리기도 한다. 이 구조물은 몇 번만 더 쓰면 곧 부서질 것만 같다. 실제로 대개의 비행물체들은 사람들의 바로 앞에 떨어지기가 일쑤였다. 조금만 높이 날아오르는가 싶으면 환성을 올리지만 또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한다. 몇 개는 철조망에 부딪히고 떨어진다.

일종의 해프닝과 같은 이 광경은 한국의 비무장지대 근방에 위치한 군사 요충지 동두천시에 소재한 미군 기지 캠프 님블 앞에서 벌어졌다. 캠프 님블은 군용차량과 헬기의 정비소로 쓰였으며, 그 땅은 2007 년 한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반환되었다. 그런데 그 기지가 한국 정부에 반환되었을 당시 그곳은 수십 년간 폐기 처분한 유해물질로 인해 심하게 오염된 상태였다. 1963 년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는 동두천시의 약 42%에 해당하는 대지를 국가안보의 명목 아래 반강제로 몰수했던 곳이다. 이제 한국 정부가 단독으로 토양 복구를 위한 예산과 책임을 전적으로 도맡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상돈 작가는 토지 재생에 정화 효과가 있는 토끼풀 씨앗을 퍼트릴 비행물체를 직접 제작하여 기지 안으로 날려보내는 워크숍을 진행한 것이다. 철조망 너머로 그 물체들이 무사히 넘어간다면 말이다.

이 퍼포먼스의 가장 대표적인 기록 사진은 한 비행물체가 캠프 님블의 철조망과 전망대를 배경으로 날아오르는 순간인데, 그것은 장난스러운 동시에 우스꽝스러우며, 캠프에서 정비되었을 헬기들과 비교하자면 연약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아마도 미국과 한국의 연합군사력과 그 동맹이 동반한 폭력의 역사 앞에서 한 개인으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과 열패감을 상징하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은 한국 현대미술을 ‘실패’라는 실마리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와 연관지어 조망하고자 한다. 물론 이 글은 한국 현대미술의 성격을 전반적으로 규명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다만, 중요하지만 충분히 논의되고 있지 않다고 판단되는 한국 현대미술의 요소들, 즉 실패, 기억, 외상에 대한 논의를 개진하고자 한다. 나는 한국 근현대사의 실패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재정립하고자 출범한 민중운동이라는 민주화운동의 실패를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는 민중미술과, 민중미술의 쇠퇴 이후 ‘정치적 미술’을 실천하는 소위 1990 년대의 ‘포스트민중’ 작가들 사이의 계보를 만들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근래의 시도를 잠시 살펴본다. 그 이유는 계보를 해석의 방법으로 사용하여 한국 현대미술이 실제민중미술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여 어떻게 다양한 양태로 실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일부 작가들은 민중민주화운동의 실패를 작업을 통해 다루기도 하지만, 나는 그러한 작업들조차도 민중미술의 계보로 환원될 수 없다고 본다. 현재 사회정치적 상황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대응하는 다른 작가들에 있어서는 말할 나위가 없다. 민중운동이 애초의 목적에 상반되는 중대한 실패, 즉 민중이라는 명목하에 또 다른 하위계층을 배제하는 등의 오류를 범했었던 반면에, 동시대의 몇몇 작가들은 실패의 여러 국면들을 작업의 일환으로 삼음으로써 현재의 정치적 상황의 부조리함과 외상의 기억들을 드러내고 있다.

민중운동의 형성과 실패

주지하다시피 지난 세기의 한국의 근현대사는 폭력적인 파열의 연속이었다. 사십여 년 가까운 일제의 유린과 한반도 전체를 초토화한 한국전쟁, 그 후 미국의 지지 하에 사십여 년간 지속된 군부정권들이 그것이다. 한반도는 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여전히 세계 열강의 이해관계의 핵심에 놓여 있으며, 구 소비에트 연방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지 30 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냉전의 지정학적 구도에 얽혀 있는 것이다.

‘민중’이라는 개념의 등장은 지식인과 학생들에 의한 이러한 근현대사의 ‘실패’, 즉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2 이러한 열패감은 한국이 탈식민화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해방, 곧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은 일본이 미국에 항복함으로써 비롯된 결과였던 까닭에 진정한 의미의 탈식민화라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해방 후 한국은 미국의 일종의 보호국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이남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사적 주체성의 위기’는 민중운동이 형성되는 동기가 되었다. 지속되는 폭압적 군부정권 하에 지식인과 학생들은 실패한 역사를 ‘수정’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들은 평범한 민중이야말로 군부정권, 재벌, 외세라는 3 대 억압 세력에 저항하고 일어설 수 있는 주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중미술운동 역시 민중운동이라는 저항운동의 한 부분으로 형성된 것이다.3

민중민주화운동은 한국의 ‘군사화된 모더니티’를4 낳은 폭압적 독재정권에 대해 일어난 대항세력으로서 1970 년대와 1980 년대에 거쳐 생성되었다. 민중운동은 사회정의 구현, 노동운동 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거리의 시위뿐만 아니라, 문학, 연극, 음악, 무용, 미술, 제례의식 등 다방면에 걸친 노동자, 학생, 지식인 등의 집단적인 노력을 수반했다. 민중운동은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에 있어 구심점 역할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수백여 명의 희생자를 낳은 1980 년의 광주민주항쟁, 그리고 역시 많은 희생자를 낳았던 1987 년의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민중운동의 특이점은 세계사적인 맥락에서 동구 유럽, 남아메리카, 남아프리카 등의 민주화운동과 비교될 수 있겠으나, 한국에서는 80 년대에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대학을 떠나 공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힘을 모았다는 점에 있다.

결과적으로 민중운동은 90 년대 들어 군부정권의 통치를 벗어나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운동의 성공이 결코 전면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민중운동이 실패한 역사를 바로 잡는 과정에서 하위타자 또는 서벌턴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서발턴 그룹들은 1961 년부터 1979 년까지 지속된 박정희의 집권 기간 동안 철저하게 침묵 속에서 사라져야 했다. 일례를 들자면, 미군과의 동맹체계의 일부로 미군 병사들을 위해 한국 정부가 관리했던 한국인 성노동자들이 그들이다. 익명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주검은 현재까지도 동두천시에 방치되어 있는 수백여 기의 묘지에 묻혀 있다. 그들은 국가의 외화벌이 대상으로 국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용당했지만, 국가적 수치를 온몸으로 떠안으면서 한국사회의 집단적 부정과 망각의 대상으로 치부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유령들에는 또한 미군 병사와 기지촌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 비전향 장기수라고 불리는 정치범들, 소년원의 청소년들, 동성애자들, 도시 하층민, 지속적으로 착취당한 10 대의 여공들, 미신 신봉자라고 치부된 무속인들, 독일 루르 지방에 보내진 광부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모두 한국이라는 국민국가 공동체의 구성에 포함되지 못한 하위주체들이다.5 뿐만 아니라 이들은 무자비한 속도전으로 몰아부치는 근대화 정책과, 민중운동이라는 사회문화적 운동이 창출한 대항 공간 사이에서도 주체로 호명되지 못하고 철저하게 잊혀진 사람들인 것이다.

한국의 맥락에서 내가 사용하는 ‘서벌턴’이라는 용어는 군부독재 정권 당시 다양한 수준으로 비/인식되고 용인 또는 거부되었던 반체제 저항 그룹 또는 여러 유형의 소수자들을 에둘러 포함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언급한 사회계층들은 가야트리 스피박이 서벌턴이라는 용어를 규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사회계층 간의 유동성, 그리고 제도적 보호와 국민으로서의 기본적 권한들을 박탈당한 경우가 많았다. 즉, 서벌턴이란 사회학자 김원이 그의 저서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에서 설명하듯이 “계급, 민족, 혹은 민중 등으로 대표되는 고정적이고 통합된 주체가 아닌, 비서구 사회의 종속 집단을 의미하는 상황적 개념”이다. 한국 근대사의 맥락에서 가장 큰 난점은, 민중운동의 지도자들마저도 서벌턴을 민중사에 포함하는 데에도 미흡하다고 여긴, 주체성을 앗긴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민중운동은 타자들에 대한 민중운동 나름대로의 억압과 배제를 내재한 또 하나의 거대 담론이 되었다는 것이다.6

한편, 문화의 영역에서 민중미술은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반체제적, 저항적 문화운동이자, 한국의 지배적인 제도 미술로서의 모더니즘에 대한 반제도적 미술운동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의 모더니즘은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어떤 형태의 개입에도 관여하지 않은 채 대체적으로 서구 모더니즘을 모방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물론 민중미술도 복잡한 양상을 띠었으며, 상호 모순점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많은 민중미술 작가들이 모더니즘 또는 반모더니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는가 하면, 또 다른 부류는 모든 유형의 모더니즘을 거부하기도 했다. 두렁과 같은 작가 단체는 노동 현장에서의 커뮤니티 연계 작업에 몰두한 나머지, 실제로 ‘작가’에 대한 기존의 의미에서 보았을 때 작가적 정체성이 완연히 해체된 사례이다.7 일련의 대표적인 민중미술 작가들은 그들의 커리어 전체를 둘러보면 형식적 또는 개념적 차원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기도 했다. 민중미술의 중요한 일면 중 하나는 대형 걸개그림에서 볼 수 있는바, 반정부 시위나 군경의 폭압에 희생된 열사들의 공공 장례식 등에 이용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보수 논객들은 정치적 목적에 예술이 이용된 사례로서 민중미술을 비순수, 극좌파, 정치적 키치 등의 용어로 비난하기도 했다.

민중미술의 급진성, 그리고 그것이 민주화에 기여한 바와 같이, 한국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한국인은 민중미술을 기억하는 데 실패했다. 90 년대 초 문민정권 수립 이후, 반체제미술로 낙인찍혔던 민중미술은 1994 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종의 회고전을 갖게 되는데, 사실상 이 회고전으로 민중미술의 종언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셈이었다. 문민정권 수립 이후 정치적 투쟁의 대상이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민중미술의 정치적 급진성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스스로에 대한 역사화의 욕망을 서둘러 표출하였던 것이다. 엄밀히 보자면, 군부정권의 폭정에 타협하고 침묵으로 시종일관해 온 기성 미술 제도권에 대한 비판적 저항이야말로 민중미술의 명분이자 존재 이유였는데, 민중미술 작가들은 급변하는 시대에 대한 적절한 새로운 가능성의 모색보다는, 공식적 한국미술사에 포함되고 싶은 욕망과 역사화의 명분에 급급해 저항의 대상이었던 제도권에 스스로 포섭되었던 것이다.8 그 이후로 민중미술은 해외, 즉 일본, 독일, 뉴질랜드 등에서만 진지하게 조망받아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생들은 민중미술을 거의 들어본 적도 없으며, 설령 들어본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매우 피상적으로만 알 뿐이다.9 지금까지도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서는 마네, 피카소, 몬드리안, 폴록 등 서구의 대가들의 걸작들을 위주로 소개하고 있는 반면, 역사적 전위운동으로서의 민중미술은 한국미술사의 타자로 남아 있다.

해석학으로서의 계보학

민중미술의 오류 중 하나는 작가들이 개념미술을 단순히 모더니즘의 한 형식적 언어로 오인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민중미술 내부적으로는 군부독재의 종식, 외부적으로는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모호해진 정치적 상황에서 그들 스스로의 성장을 억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10
1990 년대 말과 2000 년대, 즉 민중미술의 종언 이후에 성숙한 한국의 대표 작가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당시의 작가들이 개념주의를 그들 작업에 있어서 불가분한 요소로 습득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폭넓은 관심사들을 여기서 일일히 열거하기보다는, 언급한 민중민주화운동의 실패를 다루는 비판적 작업을 실천하는 작가들 중 몇 명에 국한시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우선 논의의 명료성를 위해, 나는 오늘날 ‘정치적’인 작업을 실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작가들의 도전적인 작업들을 민중미술의 전통에만 의거하여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민중미술 그 자체가 매우 복잡하고 모순적이었으며 다원적이었다는 것은 이제 널리 인식되고 있는 바이다.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의 현 상태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가 일상생활의 경험에 깊숙이 침투한 것에서 잘 알 수 있고,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민중운동이라는 민주화운동과 민중미술만이 오늘날의 여러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신자유주의적 상황에 비판적으로 대응하는 국면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민중미술과 ‘포스트민중’미술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정치적인 것, 예술에서 정치적인 것을 단독으로 선점할 수 없다는 말이다. 비평가 김장언이 강조했듯이, 중요한 점은 한국에서 예술적 아방가르드가 어떻게 지역화되었으며, 세계화의 맥락에서 한국 현대미술이 작동하는 방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폭력 아래 정치가 생정치로 둔갑한 현시점에서 아방가르드를 어떻게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11

지난 십여 년간 한국미술계에서는 민중미술의 종언 이후 여러 유형의 ‘정치적 미술’을 일컫는 소위 ‘포스트민중’과 관련된 논의가 지속되었다. 그 중 민중미술과 특정 작가의 일군을 ‘포스트민중’이라고 규정하면서 계보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실패했다. 나 역시 민중을 지배적인 담론 구조의 입장에서 전유하려는 모든 시도를 경계한다. 그것은 군부정권에 대해 대항적이면서도 또 하나의 거대 담론이 된 민중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오류를 다시 범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서 특기할 사항을 정리해보자. 첫째, 역사학자 이남희는 그의 저서 《민중》에서 ‘포스트민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민주정권 설립 이후, 세계화 시대와 신자유주의의 상황에 이르러 민중민주화운동을 돌이켜볼 수 있는 현시점을 의미하는, 민중사 이후, 또는 민중사를 너머서라는 일반적인 맥락에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민중미술과의 포스트민중 시대의 미술 사이의 ‘절합’을 고찰한다는 것은 유의미하다고 본다. 다만, 계보짓기를 통한 권력행사는 경계해야 한다. 셋째, 계보라는 용어가 지속 내지는 영향이라는 의미에서만 논의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현대 작가들이 역사와 정치의 실패, 그리고 그 실패의 후속 여파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생각할 때, 민중민주화운동이라는 거시적인 움직임과 관련짓는 것은 유익하다는 점이다.

내가 유익하다고 보는 계보학이란 단순히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의 혈통이나 영향권의 네트워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계보학은 지금까지 그늘에 가려 있던 혹은 불온하게 여겨진 지식에 활력을 불어넣는 철학적 과제이다.”12 그러므로 민중미술이 아니라 민중민주화운동과의 계보를 받아들인다면—전자는 후자에 수렴되므로—서벌턴의 ‘불온한’ 지식이 어떻게 복구되어 예술을 통하여 민중의 서사에 다시금 융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차원에서의 계보학이란 지배 담론에 대하여 전복적이며, 아직도 한국사회에 출몰하면서 부유하는 냉전의 유령들을 인식할 수 있게끔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박찬경은 민중운동의 실패에 대한 수정 작업에 천착하고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그가 실천해온 여러 서벌턴 그룹의 불가능한 재현이 그것이다. 그의 초기 작업인 <독일에 간 사람들>은 1970 년대에 독일의 차관을 받고 한국 정부가 독일로 보낸 광부와 간호사들의 현재 삶을 기록한 사진 작업이다. 박찬경의 근래 작품인 <신도안>과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는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을 재현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실험적 도큐멘타리인 <신도안>은 박정희 정권이 실행한 새마을운동의 일부인 미신타파의 일환으로 무당을 비롯한 여러 지역 종교 집단을 박해하는 과정을 더듬어본 작업이다. 그러한 제도적인 핍박에 따른 결과로 한국인의 다수는 이제 전통적인 정신세계를 그저 미신으로만 여기는 데 이르게 된 것이다. 역시 실험적 다큐멘타리인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는 압축경제성장의 정점을 이루던 1970 년대에 체계적으로 착취당하다 공장 기숙사의 화재로 삶을 마감한 10 대 ‘여공’들의 무덤을 찾는 다큐멘타리 영화감독과 그 팀의 여정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박찬경은 자신의 작업이 민중미술의 맥락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13 내 견해로는, 그가 민중미술의 마지막 세대에 안착했다고 스스로 공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에서는 민중미술의 영향은 일정 부분, 특히 타자의 재현이라는 문제에서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작업은 그가 유학 시절 공부한 정신분석에서부터 개념미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근래에는 숭고와 지역 종교 등 여러 가지의 영향력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근래의 영화는 민중 또는 민중미술 자체라기보다는 민중이라는 거대 담론에서 배제된 하위계층의 비가시성에 관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박찬경은 전통을 계승하고, 실패한 지역의 정신적 전통의 역사를 ‘수정’하고, 서벌턴을 비판적이면서도 존중하는 시각으로 재현함으로써 잊혀진 이들을 우리의 사고 한복판에 복원하려는 것이다. 박찬경은 전통문화의 복구에 매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연해졌다. 일부의 민중미술 작가들 또한 전통문화와 그 가치에 매진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민중미술과 박찬경의 연관성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역적 정신세계와 숭고에 대한 깊은 관심사를 표명했듯이, 그의 최근 작업인 만신 김금화의 일생에 대한 영화 작업은, 말하자면 서구에서 독점하다시피 한 숭고에 대응하여 한국 고유의 숭고를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와 다름없다.14 바꿔 말하자면, 박찬경 자신의 작업이 민중운동의 실패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는 있겠지만, 그의 작업을 민중운동 또는 민중미술의 연속선상이라는 차원에서만 해석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게 한계 짓는 것이다.

실패, 부조리, 트라우마

박찬경을 비롯하여 소위 ‘포스트민중’이라고 명명된 일부 작가들15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이 민중미술의 후계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작업에서 다루고 있는, 한국의 근래의 기억에 대한 실패일 것이다. ‘포스트민중’ 미술의 중요성은 그러한 기억의 실패가 외상의 고통을 드러내고 당대의 사회정치적 정황의 극심한 부조리를 드러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 글의 도입부에서 언급한 김상돈의 <디스코플랜>으로 돌아가보자. 김상돈의 작업 중에서 이 작업이 가장 강력하며 도전적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퍼포먼스 기록 비디오를 보면 워크숍에 참여한 이들이 비행물체의 궤적을 쫓느라 고개를 들고 시선을 위로 하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희망과 기대에 찬 시선들이다. 그러나 비행물체들은 정말 맥없고 한심하게 뚝뚝 떨어질 뿐이다. 이 워크숍에 참여한 작가 중 한 사람인 고승욱은 비행물체가 운반하여 철조망 너머로 뿌려야 하는 토끼풀 씨앗들을 정자에 빗대어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왁자지껄한 웃음을 자아낸다. 이것은 저급한 농짓거리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동두천이 냉전의 지정학과 관계된 만큼이나 관련된 실제 인물들, 즉 미군 병사들과 기지촌 여성들의 구체적인 욕망과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상돈이 이 워크숍을 ‘디스코플랜’이라고 명명한 것은 풍자적인 제스처로서, 동두천 주민들이 옛 미군 기지 땅에 새로운 디스코클럽을 만들자고 동두천시에 제안한 사실에서 기인한다. 동두천 주민들이 유흥 시설을 확장시켜 실질적 이익을 챙기려 하는 상황에서 퍼포먼스는 땅을 치유하기 위해 씨앗을 뿌리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평범한 것을 상징하는 지역의 풀을 이용한 탈제국주의의 시도와 다름없다. 퍼포먼스는 미군 병사들에 의해 참혹하게 살인당한 기지촌 여성들의 추모일에 열렸다.16 이러한 맥락에서 이렇게 실패한 워크숍은 “풍자적 블랙코메디이자 신화적 드라마, 그리고 고대의 의식”17 을 어우르며 한반도에서 지속되고 있는 냉전의 극심한 부조리적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근래의 볼 수 있었던, 정치적이면서도 시적인 영역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디스코플랜>은 그것이 시사하는 바에 있어서 “동시에 부질없으면서도 영웅적이며, 부조리하면서도 급진적”이다.18 퍼포먼스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으며, 만약 성공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혹은 그다지 흥미롭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상돈은 아마도 예술이 정치적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는 점을 잘 알고 이 작업을 추진했으리라. 퍼포먼스가 획득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동맹 국가들, 즉 미국과 한국의 정치군사적 동맹과 기지촌 여성들 간의 긴밀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드러내고, 냉전과 제국주의의 후속 여파를 해체해야 하는 긴박감을 강조한다는 점이다.19

작가 임민욱도 근래의 기억의 실패에 천착하는 데, 냉전시대의 서벌턴 등 목소리 없는 이들을 위한 플랫폼을 만든다.20 예를 들면 2009 년에 한강변에서 벌어진 빛과 소리를 이용한 임민욱의 프로젝트 는 장소 특정적 협업이자 연극과도 같다.
관객이 유람선에 올라타자 그들의 시선을 배 속의 무대가 아닌 배의 바깥 부분으로 유도하며 강변의 특정한 곳곳에 준비한 상황들과 접하도록 하였다.21 그중의 하나로 비전향 장기수 출신 강용주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이용하여 모스 코드와 무선통신으로 관객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담담하게 피력한다. 강용주는 한국 정부가 조작해낸 북한의 스파이임을 거부한 이유로 14 년 간의 고문과 옥살이를 한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였다. 그는 자신의 정직성을 지켰다는 이유로, 즉 “마지막으로 수호해야 하는 민주주의의 보루라고 여기는 사상의 자유를 지켰다”는 이유로 희생된 것이다.22 한강은 이 퍼포먼스의 배경이기도 하지만, 서울의 수많은 헐벗은 삶들이 겪어낸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외상의 말 없는 목격자이기도 하다.

임민욱의 근작 <불의 절벽 2> (2011)는 박정희 정권 당시 고문과 19 년 간의 감옥 생활을 한 김태룡의 삶에 집중한다. 다큐멘타리 연극인 동시에 장소 특정적 퍼포먼스인 <불의 절벽 2>는 옛 기무사 수송대가 극장으로 변환된 곳에서 열렸다. 임민욱은 외상의 기억이 지워진 그 장소에서 희생자의 귀환을 기획한 것이다. 1970 년대 말 정보부는 김태룡의 가족이 북한의 간첩단이라는 허위 정체를 조작했다. 이 때문에 김태룡의 부친은 사형을 당하고 모든 가족 구성원이 각각 다른 기간 동안 투옥되었다. 출소 후 수년간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며 은둔생활을 하던 김태룡은 진실의 힘 재단을 통해 만난 심리학자 정혜신의 도움을 얻어 자신의 경험에 대해 증언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태룡은 정혜신과 함께 <불의 절벽 2> 무대에 서서 증언할 용기를 갖게 되었다.23

<불의 절벽 2> 연극 무대로서의 공간 내부는 다큐적 공간이었고, 증언이 끝날 무렵 무대 옆 문이 천천히 열리며, 연결된 외부는 허구적 재구성을 통해 옛 기무사 수송대의 기억을 환기시켰다. 김태룡의 현재를 둘러싸고 있는
소리들로 믹스된 사운드가 퍼지고 바깥에서는 상상으로만 남은 과거의 현실을 재구성해낸 체포장면과 개를 이끄는 남자들이 연기했다. 이 모든 장면은 HD 카메라와 열감지 카메라로 생중계되며 프로젝션되었다. 고문 피해자들의 기억은 현실이라는 ‘불의 절벽’ 앞에서 타버리거나 비상해야 한다. 2011 년 현재 세계는 그가 간절히 꿈꾸는 고문없는 세상을 이루었는가. 현실과 허구의 간극은 얼마나 깊은가. <불의 절벽 2>는 미디어를 통해 미디어가 다룰 수 없는 사건과 주변인을 무대에 올렸다
.24

퍼포먼스는 민주주의와 그것이 약속한 바의 실패, 정치와 미디어의 실패뿐만 아니라, 기억의 실패와 완연히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의 불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작가는 김태룡이 자신의 외상의 기억을 심리학자와 관객들과 공유하는 상황을 만들었는데, 관객이 외상을 입은 생존자의 목소리를 듣게끔 하지만, 결국 그들은 생존자의 외상의 경험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애초의 외상의 경험은 생존자 스스로에게도 모두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반복되는 악몽과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생존자는 외상의 파악 불가능성을 깨닫게 된다.25 그러므로 개를 이끈 이들이 김태룡을 검거하는 순간을 다시 실연하는 장면들은 마치 꿈을 꾸는 것과 같으며, 외상을 입은 생존자에 있어서 그것은 놓쳐버린 현실과도 같다. 그와 같은 재실연은 실제 무대 바깥에서 일어나는데, 그것은 마치 “외상의 충격은 그것을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거부하며, 하나의 단일한 장소나 시간의 경계 바깥에서 드러나기를 고집한다”26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관객들은 열감지 카메라의 사용으로 외상의 열과 극렬함, 그리고 그 정황의 극심한 부조리함에 깨어나게 되며, 비록 현재 극장이라는 장소에서 재구성되고 재실연되었지만 호출된 역사의 목격자로서 거듭나게 된다.

지금까지 돌아본 작업들은 공통적으로 죽음충동과 더불어 떨어지는, 혹은 떨어져버린 몸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박찬경의 영화 <신도안>은 인간에게 내재한 죽음과 미지의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다.27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는 화재 사고로 목숨을 앗긴 여공들의 무덤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과정에서 박찬경은 스스로가 무덤 사이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데, 이 때문에 길게 자란 풀 사이에서 완전히 모습이 사라진다. 몇 초 간의 침묵의 순간이 지난 후 그는 일어나서 몸을 추스린다. 언급했듯이 김상돈의 <디스코플랜>은 미군 병사들에 의한 기지촌 여성들의 살인의 역사가 작업 이면에 흐르고 있다. 임민욱의 협업 퍼포먼스에서 고문과 투옥의 생존자들은 죽음의 위협을 당면하여 외상에 의한 깨어남을 반복적으로 겪었으리라. 서벌턴들의 삶과 죽음의 위기를 다시금 대면하는 작가들이—최근 ‘포스트민중’ 미술에 대한 논쟁을 둘러싼 계보의 정치성을 초월하여—공유하고 있는 것은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비록 뒤늦었지만 외상의 경험을 다시 겪는 자리를 마련한다.

서벌턴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이 작업들을 함께 고려해볼 때, 외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 ‘반복된 실패’와 연루된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첫 번째는 애초의 외상의 사건을 겪을 때, 그리고 두 번째는 작업을 통해 외상의 기억을 대면하기 위해 깨어날 때 그러하다.28 실제로 많은 한국인들은 근래의 엄청나게 참혹한 사건들을 말 그대로 모르는 채로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은 민주화운동의 정점이었던 1980 년의 광주민주항쟁과 그 잔혹한 학살의 역사를 당시 미디어 검열로 인해 모르다가 수년 후에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안양 공장의 화재 희생자들의 죽음을, 기지촌 여성들의 살인을, 허위 스파이의 처형과 비전향 장기수들과 장기 투옥을 목도한 이는 없다. 한국인들에게 그들의 죽음을 이러한 작업을 통해 대면한다는 것은 한국인의 집단 심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악몽 속에서 그 죽음을 너무나 뒤늦게 보는 것이다. 관객들이 이러한 작업을 대면한다는 것은 그들의 외상을 일깨우는 것에 다름없다. “깨어난다는 것은 바로 스스로 예전에 제때에 보는 것에 대한 반복적인 실패를 일깨우는 것이다”라고 캐시 카루스는 기술하고 있다. 깨어나는 순간은 “타자의 죽음에 대해 반응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깨닫게 한다.29 그렇다면 이러한 작업들을 대면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생존자들, 즉 (한국인) 관객들이 반복해서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수반한다. <신도안>,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 <디스코플랜>이 서벌턴의 몰살 또는 비극적 죽음이 그 숨겨진 의미라면, 관객은 그들이 겪어야 했던 죽음의 생존자와 다름없다. 우리가 서벌턴의 생존자라는 점을 수긍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외상의 사건들의 생존자로서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와 <불의 절벽 2>의 장기수와 관련해서 관객은 또한 죽음의 생존자들의 목격자가 되기도 한다. 관객은 생존자가 그의 외상으로부터 서서히 떠남을 목도하지만, 동시에 그가 반복을 통해 외상을 다시 겪어야 함을 목도하기도 한다. 즉, “외상을 겪는 이에게 있어서는 애초의 외상의 순간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외상적이며, 생존 그 자체가 바로 위기인 것이다.”30 한국 현대미술에서 볼 수 있는 외상에 대한 ‘실패’한 말걸기에 내재한 중요한 모순은 바로 “우리 안의 고통의 잃어버린 진실을 다시 이야기하기”가31 필요할 뿐만 아니라 당면 과제이지만, 동시에 외상의 내재된 측면은 바로 외상에 대한 완전한 앎에 접근할 수 없고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파악하는 데 반복해서 실패하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김상돈의 작업과 관련한 실패에 대한 논의, 특히 <디스코플랜>에 대한 논의, 그리고 해석학으로서의 계보에 대해서는 김상돈에 대한 필자의 논문에서 이미 길게 언급한 바 있다. 다음을 참조할 것. 문영민,「잠복의 시: 부정형의 계보학」,『풍경의 배면: 성속의 밀어를 듣다』(현실문화, 2012).

2. Namhee Lee, The Making of Minjung: Democracy and the Politics of Representation in South Korea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2007), pp.2-°©‐3, 37-°©‐44.

3. Namhee Lee, 같은 곳. 문영민,「잠복의 시: 부정형의 계보학」, p.176.

4. Seungsook Moon, Militarized Modernity and Gendered Citizenship in
South Korea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5).

5. 김원,『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사건, 기억, 그리고 정치』, 현실문화, 2011, p.21.

6. 김원, 같은 곳.

7. 한국의 지식인, 학생, 작가들이 노동자들과 뜻을 공유한 것은 최근 회자된 관계적 미학보다 대략 2-30여 년 앞선 것이며, 후자의 이론적 틀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오히려 지식인과 노동자들 간의 평등을 찾으려 했던 노력들은 폭압적 정권에 맞서 화합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8. 이에 대한 김수기 선생의 지적에 감사의 뜻을 밝힌다.

9. 박찬경,「민중미술과의 대화」,『문화과학』, 2009겨울, vol. 60, p.151. 실제로 필자가 2012년에 서울의 한 명문대 학생들을 상대로 민중미술에 대해 물어봤을때, 40명 중 단 한 명만이 알고 있었는데, 그 학생의 아버지는 작가였다. 나머지는 민중미술에 대해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10. Wan‐kyung Sung, “From the Local Context: Conceptual Art in South Korea,” in L. Camnitzer et al.,eds., Global Conceptualism: Points
of Origin 1950s – 1980s (New York: The Queens Museum of Art, 1999), p.124.

11. 김장언,「예술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아트인컬쳐』, 2010년 3월호.

12. 김원, pp.463‐464. 다음도 참조할 것. Joseph Childers and Gary Hentzi, eds., The Columbia Dictionary of Modern Literacy and Cultural
Critic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5), pp.122-3. 문영민, 「잠복의 시」, p.176.

13.「살롱 1: 한국현대미술의 ‘비판성’과 작가들의 ‘관심,’」, 라운드테이블 논의, 박찬경 호스트. 『연속과 강도: 2008‐2010, 58명의 참여, 한국현대미술』, 포럼 A, 2010, pp.84-°©‐102. 박찬경이 스스로 민중미술의 마지막 세대라고 공언했지만, 내 견해로는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의 ‘회고전’ 이 열린 몇 년 후인 200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그의 성숙한 작업을 볼 수 있었다.

14. 그렇다고 해서 나는 박찬경이 미학에 있어서 동양 대 서양 식의 이분법적인 접근을 취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일종의 ‘대면’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 ‘대면’이란 “단순히 있다고 가정되어 ‘허위의식’만 제거하면 드러나는 그런 현실과의 대면이 아니라, 오히려 있다고 가정된 그 현실의 이상한 부재감, 그러한 폭력과의 대면이다.” 이러한 폭력이 옛 신도안을 제거한 것이며 오늘의 한국인의 정신 속에 “신비주의, 낭만주의, 이상주의”의 여지마저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박찬경, 『신도안』, 아텔리에 에르메스, 2008, p.14.

15. 작가 임민욱은 그가 ‘포스트민중 ‘작가 중 한 명으로 명명되는 것에 대해 강력한 거부감을 드러냈는데, 그것은 ‘포스트’의 의미가 지속, 연속, 영향의 뜻에 제한될 경우에 그러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임민욱의 작업을 민중미술의 이후, 또는 트랜스의 의미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언급했듯이, 계보를 굳이 따지자면 민중미술보다는 민중민주화운동과의 관계를 살피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군부정권 당시 사라진 이들에 대한 작업도 실천해왔지만, 많은 작업들이 신자유주의 상황에서 변화하는 문화적, 사회경제적 조건들에 대한 비판과 대응이기도 하다.

16. 미군 병사가 행한 범죄들 중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건은 1992년의 윤금이의 살인이다. 미군 이병 케네스 마클(Kenneth Markle)은 유죄가 인정되어 13년간 수감된 후 미국으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한미군사협정을 수정하라는 한국인의 요구를 촉진시킨 계기가 되었다. <디스코플랜>은 윤금이의 죽음의 15주년 추모일에 벌어졌다.

17. 김희진, “Save the last dance for your fear: Shamanistic Practice of Sangdon Kim,” 미출판 논문,
2010.

18. 다음의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ÿs)의 작가 노트를 보라. Claire Doherty, ed., Situation (London: Whitechapel, 2009), p.40.

19. Katharine Moon, Sex Among Allies: Military Prostitution in U.S‐Korea Relati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7). Chen Kuan-Hsing, Asia as Method: Toward Deimperializat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0).

20. 임민욱의 작업은 여러 층위에서 작용하는 협업적, 학제적 실천인데, 그는 비전향 장기수, 소위 ‘정치범,’ 또는 서벌턴의 재현의 도전뿐만 아니라, 제도의 비판, 한국 근대화 과정의 비판, 신자유주의의 폭력성 등 폭넓은 이슈들을 다루어왔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 중 가장 도전적인 작업을 해온 이들 중 한 명으로서, 예술의 정치적인 것의 가능성의 확장에 천착해 왔다. 여기서 나는 그의 작업의 논의를 주로 외상의 기억과 관련해서 기술하고 있다.

21. 그 첫 번째 상황은 젊은이들이 이명박 정권이 숱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실행하여 에코시스템을 파괴한 4대강 사업에 대한 시위이다. 두 번째 정황은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로 인한 끝없는 공사 때문에 갈 곳 없는 한 젊은 커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선장치를 이용해 즐겁게 뱃속의 관객들에게 행하는 말걸기이다.

22. 임민욱, 수잔 깁스와의 인터뷰.
http://minouklim.com/index.php?/interview‐articles/minouk-lim-with-susan-gibbs/ 2013년 2월 15일 검색함.

23. http://minouklim.com/index.php?/works/firecliff-2seoul/ 2013년 2월 15일 검색함.

24. http://minouklim.com/index.php?/works/firecliff‐2seoul/ 2013년 2월 15일 검색함.

25. Cathy Caruth, Unclaimed Experience: Trauma, Narrative, and History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6), pp.1‐9. 26 Cathy Caruth, ed., Trauma: Explorations in
Memory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5), p.9. 27 박찬경의 작업에 있어 죽음충동과 애도에 대한 확장된 논의는 다음의 필자의 논문을 참조할 것. 문영민, “Chan-kyong Park: From the Memories of the Cold War to the Sublime” in Image Clash: Contemporary Video Art from South Korea (Boulder: University of Colorado Museum), 2012. 한금현 큐레이터 기획.

28. 여기서 나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의 7장의 꿈 이야기에 대한 라깡의 재해석을 확장시킨 캐시 카루스의 논점 중 ‘반복된 실패’라는 개념을 빌려왔다. 그 꿈은 죽은 아이가 꿈 속에서 살아나서 자신의 시체가 엎어진 촛불에 타고 있다고 잠든 아버지를 일깨운다는 이야기이다. 다음을 참조할 것. Caruth, Unclaimed Experience, pp.102‐107.

29. Caruth, Unclaimed Experience, p.100.

30. Caruth, Trauma, p.9.

31. 같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