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예술잡지 F 17 호
천사와 폐허 : 임민욱의 <내비게이션 아이디>에 대한 사적인 단상들

서현석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교수

1950년 7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군인과 경찰에 의한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경남 진주에서는 1,000여명, 경북 경산에서는 3,500여명(유가족 추정)이 재판도 없이 집단으로 사살됐다. 상당수의 희생자는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에 기결 상태로 복역중이던 정치범이나 농민들. 혐의는 인민군 부역. 그나마 2009년에 와서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밝혀진 사실들이다. 이른바 ‘경산 코발트 광산사건’과 ‘진주 민간인 학살사건’. 시신의 일부는 아직까지도 안치되지 않고 컨테이너에 방치된 상태다. 그나마 유족회가 마련한 콘테이너. 잠깐 미디어의 관심을 받았지만 ‘과거사 정리’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역사는 어떻게 기억하고 이야기 해야 할까? 65년 전의 부당한 국가 폭력을 이해하기 위한 오늘날의 감각은 어떤 형태가 될 수 있을까?

리뷰
2014년 9월 3일.

유골을 실은 두 대의 컨테이너 트럭이 고속도로를 달린다. 뒤따르는 버스에는 두 학살사건의 유족들이 타고 있다. 경산과 진주를 떠난 버스가 함평의 일행과 합류, 도로 위의 장례행렬을 잇는다. 모두 30여명. 오마이뉴스 취재팀과 앰뷸런스까지 합세했다. 유족들의 눈은 모두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다. 인질처럼. 처형 직전의 사형수처럼. 암흑의 시간은 고통의 장황한 연장이려나, 아니면 역사 속의 가녀린 찰나려나. 장례행렬은 역사의 소환이기 이전에 하나의 ‘미디어 이벤트’다. 버스 안을 비추는 카메라, 그리고 트럭을 따르는 헬리콥터가 산 자와 죽은 자들이 엮인 속도의 궤적을 이미지로 송출한다. 영상이 상영되는 곳은 전시 시작을 앞둔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짧지 않은 여정의 최종 도착지이기도 하다. 공중으로부터의 메타-시선과 가려진 미시적 시선 사이 어딘가에 역사의 궤적이 있을까.

서현석: 2000년대의 일련의 작업들에서 미술관이라는 공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갈망 혹은 미학적 필요성 같은 것이 있었나요? 있었다면 무엇이었나요? 지금은 십 년 전과 어떻게 달라지고 있나요?

임민욱: 서울에 처음 돌아왔을 때 광고판이 비어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사진을 설치했고 2004년엔 두 개의 컨테이너를 전시를 했었죠. “미술관을 벗어나려는 갈망이 있었다”고 말씀하시지만 전시공간이 싫어서 그렇게 나갔던 것은 아닙니다. 화이트 큐브와 다른 공간을 다시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요. 제겐 미술 아닌 것에서 미술이 되어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2005년 <뉴타운고스트>가 트럭 위에서 드럼을 치며 랩을 하고 2009년 <포터블 키퍼>와 가 일시에 폐허가 된 마을 주변을 맴돌고, 한강 유람선이 서치라이트로 도시를 스캐닝하던 스케일은 그런 차원의 상상이었습니다. 이 땅은 십 년 전부터 폐허와 천사가 겹쳐 출현하는 시간들을 겪고 있는 것 같아요. 아마 그런 것이 앞으로 다가오는 공동체와 주변의 운명이며 그렇게 제 작업은 탈구된 시공간을 대면할 것 같습니다.1

포장도로 위에서 매끈하게 흐르는 빠른 속도라 할지라도 시간 속의, 시선 간의 어두운 공백을 메우기에는 벅차다. 다섯 시간의 여정은 망각된 폐허에 비한다면 왜소하기만 하다. 그 어떤 살풀이라도 죽은 자들의 흔적을 고속의 미디어 사회로 소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누군가는 말한다. 헬리콥터의 소음이 “거대한 목탁 소리”1 같다고.

이 여정은 어쩌면 소통의 철저한 불가능만을 소통하고 있을지 모른다. 시선의 공백만을 곱씹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역사적 진실은 검은 암흑 뿐일지도 모른다. 역사는 암흑이라는 이미지의 태생적 기반을 어둡게 비추는 빛일까. 미디어 이미지와 유보된 치유 사이 어딘가에 ‘공적 기억’이 숨쉬고 있을까. 이 심상치 않은 행렬을 적절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사진 이미지를 배제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검은 프레임 하나를 이 글의 제목으로 삼는다면 먹먹함이나마 표할 수 있을까. 미디어가 종용하는 침묵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사는 ‘제대로’ 현현할 수 있을까? 역사란 무엇일까? 미술이란 무엇일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만 할까? 2014년 9월 3일, 정말로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서현석: 관객들의 체험을 미술관에서의 오브제 중심의 관람이 아닌 보다 입체적이고 유기적인 체험으로 재편성하고 계신데, 오늘날의 미술계 전반의 일련의 시도들, 이를테면 퍼포먼스나 관계미술과 비교해 볼 때 본인의 작품이 뭔가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늘 염두에 두는 형식에 관한 중요한 쟁점들이 있는지요?

임민욱: 관계 미술? 그런 말이 있나요? 아무튼 관계의 미학 같은 이론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관계설정보다는 전달과 기록의 형식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 지점에서 제 작업은 영혼의 ‘inter’와 형식의 ‘multi’ 속에서 어떤 조인트가 되길 바랍니다. 조인트는 다양한 흐름을 구축하고 다른 성질의 에너지로 전환시켜주니까요. 저는 한국에서 2004년 컨테이너 작업과 2005년 <뉴타운 고스트>에서 다원예술에 대한 정의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해석해 나갔습니다. 요즘 미술계에서 다시 주목하고 있는 퍼포먼스에 대한 관심은 2007년 페스티벌 봄의 시작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장르의 경계와 재현의 문제를 재 질문하도록 했지요. 서구의 아방가르드 미술 속에서 이미 나타났던 질문들이었으나, 지금 미술계는 오히려 연극과 무용의 방식으로 퍼포먼스를 수용해 나가는 것 같습니다. 어떤 동상이몽이 있는거죠.

제 작품에도 그런 어긋남이 있었습니다. 6년 전, 입을 수 있는 조각으로 소개했던 <포터블 키퍼> 오브제와 퍼포머 권병준의 비디오 속의 관계는 주소가 사라진 장소의 내비게이션 화살표처럼 부유하고, 바람을 찢는 사슴 뿔처럼 혼자였지요. 그런데 3년 전 워커아트센터에서 무용수들과 입을 수 있는 조각 시리즈를 가지고 협업을 했을 때는 다른 문제들에 부딪혔습니다. 관계에 대한 입장과 해석은 각자 달랐습니다. 저는 퍼포먼스 오브제들을 가지고 몸의 역동성을 드러내거나 또 다른 재현적 움직임을 보고자 했던게 아니라 오히려 오브제 때문에 구속받는 신체, 페허의 풍경이 된 몸을 드러내주길 바랬지요. 하지만 그건 제 생각이었고 무용수는 전문성을 발휘해 춤을 추었어요. 다시 말하자면 전문성은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았어요. 더 나아가 전문성은 타자를 반복 속에서 분해시켜버리는 힘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전문가로서 타 장르의 폐쇄성을 고발하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2010년 제가 직접 렉쳐퍼포머로 나섰던 적이 있는데, 무대에 서기 전에 포터블 키퍼를 좋아하는 시인에게 주면서 가지고 돌아다니거나 편지를 써주길 바랬던 기획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걸 부탁하는 저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그것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모호한 관계맺기였는지 몸서리쳐질 정도이고 거절받은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 지점이 바로 관계의 미학이 왜 실패할 수 밖에 없고 미술계 안에서 인맥을 강화하는 엘리트적 수사학에 그쳤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서현석: 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이미지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단면들 외에도 미술이라는 맥락이 유령처럼 스믈거린다. 영화의 중복화면처럼 중첩된다. 예술이 역사와 미디어의 간극에 침투하는 일련의 플래쉬백.

■ 존 에프 케네디의 암살을 실제 현장에서 재연한 창작집단 ‘앤트팜(Ant Farm)’의 <영원한 프레임(Eternal Frame)>(1975). 다분히 작위적인 연기와 분장 등 이런저런 소격장치들은 연출의 설득력을 스스로 훼손한다. 자동차에 타고 있던 케네디가 머리에 총탄을 맞자 본네트 위로 기어올라가는 재클린 케네디 역할의 건장한 남성 퍼포머는 이벤트의 가증스런 허구성을 뻔뻔하게 드러낸다. 그 드러냄은 일련의 질문들을 촉발시키기 위한 제의적 절차다. 이미지는 역사를 어떻게 전달하고 기록했는가? 아니, 어떻게 구성했는가? 역사와 기억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각색되는 것이다.
■ <오그리브전투(The Battle of Orgreave)>(2001)는 1984-85년 영국 오그리브 탄광의 파업 중에 발생했던 광부들과 경찰의 충돌을 그대로 재연한 이벤트다. 미술사가이자 큐레이터이기도 한 제레미 델러(Jeremy Deller)는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함에 있어서 미디어를 철저히 배제한다. 15년 전 사건에 연루되었던 실제 광부와 경찰들의 기억을 경청하고, 이들을 재연에 참여시킨다. 역사를 반복하기 위함이 아닌, 역사에 대한 재고를 위한 재연이다. 허구에 대한 참여는 진실에 대한 감각으로 변환된다. ‘진실’은 물론 참여자들 각자의 몫이다. 재고로서의 역사.
■ 루마니아 작가 이리나 보테아(Irina Botea)는 1989년에 일어난 루마니아 혁명을 재연하기 위해 시카고에서 연극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캐스팅한다. <혁명을 위한 오디션(Auditions for a Revolution)>(2005)은 엄격히 말해 혁명을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 당시의 텔레비전 방송을 재연한다. 뉴스 캐스터의 보도로부터 현장화면에 이르기까지 혁명을 전하는 이미지들이 하나하나 재연된다. 루마니아말을 하지 못하는 연기생들은 실제 사건과 재현 체계의 머나먼 간극을 드러낸다. ‘역사적 진실’은 머나먼 지평에서 아른거린다.
(…)

서현석: 그동안 한국의 근현대사의 단상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오셨는데,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됩니다. 역사라는 거대 맥락에서 미술이 할 수 있는 특정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임민욱: 뒤돌아보니 결과적으로는 좀 그런 것 같습니다. 제겐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기록할지 그 마음과 형식을 매번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했으니까요. 하지만 역사적 사건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처럼 거대한 차원에서 부여받은 사명감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개인적 차원 속에 자리하고 있는 파편같은 게 있었을 뿐이죠. 그런데 뭔가가 연결되어 있었고 그 흩어진 조각들에게 다시 이야기의 잠재성을 부여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역사에서 기억은 ‘전체’와 ‘개별’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볼 수 있겠죠. 어느 시대에나 개인의 기억은 정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공식적인 역사의 기록이 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예술은 역사가 은폐한 현존재들을 불러내고 이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가상의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것의 기록이지 않습니까. 흔히들 ‘기억을 더듬어 그려본다’합니다. 뭘 그려서 이해를 도모하는 선생님들 많잖아요. 더 나아가 그린다는 것은 일종의 비전을 갖는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그 그림이 꼭 평면 위 구상이거나 사실주의적 재현이어야 하나요? 저는 항상 매체와 도구를 선택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붓을 드는 것은 아닌가, 사진기를 드는 것은 아닌가, 사람 말을 듣는 것은 아닌가, 내가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아닌가, 이 매체를 왜 사용하는가 되묻습니다. 그래서 제 비디오 작품들이 반 추상적 내러티브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 여지 속에서 예술은 지속적으로 사회에 이의를 제기하며 사람의 기억이 사라지고 물신화되어 가는 역사를 비판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거라고 봅니다.

서현석: 임민욱은 앤트팜이나 보테아처럼 미디어의 역사쓰기를 곱씹지 않는다. 앤트팜처럼 미디어 밖의 현실을 상상하지도 않고 보테아처럼 미디어 안의 현실을 반복하지도 않는다. 역사쓰기의 어려움을 역설하지도 않는다. 임민욱의 여정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이미지의, 무대의, 미디어의 작위성을 꼬집는 것으로부터 오히려 거리가 멀어진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거리두기는 또 다른 형식적 타협이자 안주다. 이미지임을 스스로 밝히는 이미지는 역사를 바꾸지 못한 게다. 형식은 현실에 변혁을 가하지 못한 게다. 아방가르드는 죽었다. 미술은 죽었다. 그렇다고 델러가 그러한 것처럼 미디어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미디어의 권능은 배제할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차라리 미디어를 재전유한다. 미디어를 벗어난 재해석의 장을 만드는 대신 미디어의 개입을 종용하면서 또다른 역사를 만든다. ‘미디어 이벤트’임에 기꺼이 근접함으로써 <내비게이션 아이디>가 소환하는 바는 역사와 미디어의 관계에 관한 하나의 부정하기 힘든 진실이다. 임민욱은 나아가 미디어와 실재의 경계에서 언어와 이미지를 극복하는 방법을 꾸준히 찾는다.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꾸준히 모색하고, 설득한다. 미술을 살리는 방법은 미술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듯. 재전유와 제의 사이 어딘가에서 ‘역사적 현실’을 추출한다. 현재형의 역사. 그것은 그만큼 절박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사쓰기에 대한 절박함. 현재형의 역사를 직조하기 위해서는 별다른 재현의 연금술이 필요할까? 익명의 비전향 장기수(), 간첩죄로 19년 옥살이를 한 김태룡(<불의 절벽>)의 자기발화는 작위적인 재현 체제를 뚫고 묵직하고도 생생한 역사적 현실을 활성화한다. 무대나 조명 같은 연극적 장치들의 허구성 속에 현실의 생경함이 배치된다. 무당이 역사의 비가시적인 층위를 가시적인 현실 속으로 불러들이듯, 임민욱은 장치의 내부적 결에 역사를 빙의시킨다. 재현의 조직이 틈을 드러낸다. 제 4의 벽이 열린다. 넌지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마땅 그래야 한다는 듯, 혹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 재현 장치의 틈을 트는 역사적 실재는 비정형적이고 유보적이다. 유령처럼. 그럼에도 개인의 삶을 통제하고 변형을 가하기 시작한다. 유령처럼. 그것은 곧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이다. 폐허로서의 역사.

역사는 쓰기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성립된다. 역사를 기록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 역사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수행언어’의 자명한 원리다. 모든 ‘쓰기’는 ‘하기’다. 본연적으로. 어쩌면 임민욱이 수행적으로 쓰고자 하는 것은 역사뿐 아니라 역사를 써야 하는 절박함 그 자체일 지도 모른다.

서현석: 이동 과정이 영상으로 전송되거나 오마이뉴스 보도팀이 합세한 형국은 이 여정이 ‘미디어’로 부터의 자유를 가장하기 보다는 오히려 미디어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동반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퍼포먼스나 실제 상황이 갖는 특유의 물성과 미디어의 재현적 층위에 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임민욱: 미디어의 세계는 보여주는 것만 보이게 합니다. 미디어 생산자들의 선택으로 시청자들에게 보이는 것과 시청자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거죠. 유해를 이송하면서 생중계를 한 것은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의 비판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민간인 학살을 다루는 미디어의 기존 문법까지 포함해서 <내비게이션 아이디>를 작품으로 한 것입니다.

혹자는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의 현재 모습을 다룬 <내비게이션 아이디>를 ‘유골 퍼포먼스’라고 쉽게 부릅니다만, 저는 이런 평은 담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품 속에 들어와 있는 피해자 가족과 컨테이너에 들은 유해는 퍼포먼스의 재료들이 아닙니다. 미술계는 미디어의 재현 층위를 특정지어 이 작품이 제시하는 또 다른 미디어로서의 비평적 시각에 관심이 없는것 같아 보입니다. 미술계는 왜 유해를 경산과 진주 골짜기에서 광주 도심으로 가져왔는지, 버스에 유족들을 태우고 왔는지 묻지 않습니다. 또한1950년의 피학살자 유가족과 1980년 광주5.18 어머니들의 만남, 하자센타 청소년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이 만남의 의미를 묻지 않습니다.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위성생중계를 통해 전 세계를 엮으면서 글로벌리즘과 과학기술 진보에 대한 긍정적 추상을 보여주었죠. 이에 반해 <내비게이션 아이디>는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역사와 사람들을 대면시켜 인간의 존엄을 성찰하는 구체성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미디어 재현이 추상적이었다면 반복이 불가능한 퍼포먼스도 눈에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서현석: 임민욱은 역사적 사건이 ‘이미지’로 박제되지 않고 살아나도록 응급조치를 취한다. 아니, 이미 ‘이미지’로 평면화된 역사를 현실 속으로 다시 끌어오려 한다. 유골은 이러한 제의적 절차를 위한 매개다. 상징의 세계를 역사적 현실로 이동시키기 위한 촉매다. 과거에 대한 확고한 물증이자 상징, 그 잔재이자 현전. 바니타스 회화 속의 상징도, 뻔뻔한 다이아몬드 조형물도 아닌, 절대적 물성. 하지만 미디어의 시선에 포획되지 않는 이면이자 타자. 검은 시선으로 가릴 수 없는, 아니 검은 시선으로써만 볼 수 있는 모순적 진실이라고 해야 할까. 유골이 현현시키는 ‘그것’은 재연도 재현도 아니다. 하나의 수행적 현실이다. 선언과도 같은, 제의와도 같은, 미세한 질감과 둔탁한 양감을 가진, 시공간적 현현. 선험적 관념이 아닌, 생경한 현존. ‘역사’. 타자로서의. 타자로서의 역사에는 목적이 없다. 아무도 왜 이 행렬을 왜 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침묵은 질문을 만드는 강력한 장치다. 어쩌면 죽은 자에 대한 ‘윤리’나 ‘도의’와 같은 사회 담론의 도구들로써는 촉발 될 수 없는 질문들. 죽은 자들의 기억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산 자들의 감각은 어떻게? 어떻게 하면 역사를 통계가 아닌 ‘감각’으로써, 이미지가 아닌 ‘감각’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을까? 미디어 이미지가 현실을 관통하는 제의로서 작동할 수 있을까?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고행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고통을 치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들은 유효한 것일까?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어떻게 나의 가려진 시선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것이 유효한 문제이기는 할까?
“임민욱의 작품에서 역사적 현실은 연극적 장치를 관통하여 실재로서 현현한다”라고 이 작품을 설명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작품’의 가치를 운운하는 비평적 제스처는 도리어 이벤트로서의 유기적인 입체성을 평면으로 축소시키지 않는가. <내비게이션 아이디>는 평론의 역할을 재고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는 곧 ‘미술’을 재고해야 할 필요성이기도 하다.

임민욱이 제안하는 것은 작품의 조형적 완성미에 대한 탐미적 교감이 아니라 담론 만들기다. 감각의 담론이랄까. 답이나 목적이 미리 정해지지 않는 질문들의 여정. 질문으로서의 여정. 침묵 속의 여정.

서현석: 기존 작품들과의 연속적인 맥락에서 <내비게이션 아이디>가 갖는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요? 이를테면 죽음이라는 주제는 기존 작품들에서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임민욱: <내비게이션 아이디>의 주제가 죽음이라고 보셨나요? 저는 오히려 삶이었다고 생각했는데요. 왜냐하면 유골이 담긴 컨테이너가 일상의 공간 속에 방치되어 있는 현실을 보며 죽음은 어떻게 일상이 되었는가를 질문하면서 시작했기때문이예요. 삶이 주제였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이 인식할 수는 있지만 경험할 수는 없는 사건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의 ‘죽음’은 생산적인 삶을 위해 배제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삶과 죽음 간에는 아무런 교환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보드리야르가 제기했듯이 ‘죽음’은 죽은 사람이나 몸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고 일종의 “사회적 관계의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산 사람들이 그 ‘죽음’과 맺는 어떤 관계의 형식이자,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는 겁니다. 이처럼 개인과 사회, 공동체에 대한 질문이 제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퍼포먼스 오브제의 문제의식이지 않나 싶습니다. 제 작품들은 사람들의 일상이 공동체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해체되는지, 삶의 터전과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변해가는지 나타낸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비게이션 아이디>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실제 진행되고 있는 “어떤 죽음”을 말한 것입니다. 학살당한 이들의 시간으로 보면 이 ‘죽음’은 지난 일이라고 하겠죠. 하지만 희생자와 그 가족, 그리고 시민의 권리에 대한 공동체의 규범을 생각해보면 한국전쟁때 살해당한 이들의 ‘죽음’은 국가와 정치, 권력을 비판적으로 보게 합니다. 권리의 보편성, 시민 권리의 일반적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모두 국가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예술에서 삶과 관계없이 죽음을 논하거나 형상화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현석: 여정이 끝난다.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의 앞마당. 택배처럼 유골이 배달된다. 미술에 대한 청구서처럼. 미술이 짊어져야 할 숙제처럼. 일침처럼. 버스에서 내리는 유족들을 맞는 것은 역사의 또 다른 실증적 실체들. 오월어머니집의 회원들이다. 부당한 죽음이 또다른 죽음과 만나며 삶의 시공간을 가로지른다. 여전히 눈이 가려진 유가족들의 불안한 발길은 타인들의 부축에 이끌려 전시관 내부로 향한다. 30년이라는 간극을 좁히는 만남. 아니, 간극을 드러내는 만남. 역사적 현실이라는 날 것의 실체. 미디어의 민 낯. 생생한 역사적 현실은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장치 속으로 입성한다. 아니, 애초부터 이 역사쓰기는 장치 속에서 작동하고 있던 게다. 여정의 타성은 계속되는 질문들로 전환된다. 미술은 이미지를 역사로 되돌릴 수 있을까? 미술은 역사를 현실로 들여 놓을 수 있을까? 미술은 역사에 대해 어떤 책무가 있는 걸까? 그 책무는 얼마나 유효한 것일까, 역사 속에서? 어쩌면 비엔날레에서는 만남의 ‘이미지’와 유골의 ‘아우라’ 사이 어디엔가에서 표류하는 ‘미적 감각’만이 전리품처럼 전람될지 모른다. 제도화된 미술의 한계를 운운한다 해도 지나친 비관이 될 리는 만무하다. 진부한 클리셰가 될 수는 있겠지만. 미술은 과연 역사를 끌어안을 수 있을까? 미디어와 역사와 미술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폭력에 대한 기억을 공통 함수로 삼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유골과 유족들은 무엇을 위해 이 먼 길을 감수했는가? 가능성들이 아른거리는 와중에도 ‘퍼포머’들의 눈은 가려져 있다.

서현석: 여정은 비엔날레 전시관이라고 하는 다분히 제도적인 공간에서 마무리가 되었는데, 장소의 특정성에 관한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요?

임민욱: 아시다시피 비엔날레는 과거에 소수의 전문적이고 특정한 계층을 대상으로 한 미술을 대중적으로 나누고자 제도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비엔날레는 말씀하신대로 지역경제와 정치적 목적에 부흥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또 다른 제도적 공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엔날레를 수평적 사유와 공동체의 감각을 대면하는 장으로 만드는 것은 미술계의 끊임없는 노력만이 이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술은 당대의 현실 속에서 이상적인 것을 갈망하는 힘이 만들어 내는 창작 과정입니다. 이런 면에서 제도화되어버리긴 했지만 비엔날레는 안주할 수 없는 현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아트페어와 다르게 담론의 창을 열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비네이션 아이디>를 비엔날레에서 보여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내비게이션 아이디>는 미래를 갈망하는 데서 시작했고 또 다른 원근법을 그리기 위해 기존의 틀을 벗어나야지 가능한 작업이었습니다. 이건 마치 미술을 포기했더니 비로소 미술을 다시 만난 것과 같았습니다.

서현석: 임민욱은 말한다. 비엔날레를 취재하는 기자들이 이 작품으로 인해 ‘경산 코발트 광산사건’과 ‘진주 민간인 학살사건’에 다시 관심의 시선을 돌리기는 했으나, 그건 극히 잠시 동안이었다. 그것으로 과거사가 새로운 국면에 들지는 않았다. 미디어가 역사를 망각의 심연 밖으로 끌어내주지는 않는다. 망각과 싸우는 것이 미디어의 역할은 아닌 게다. 더 이상. 우리는 미디어가 침묵의 소용돌이 속으로 과거사를 방치하는 솜씨를 다시 목격한다.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망각이다. 그렇다면 망각과 싸우는 것은 미술의 역할일까? 미디어가 방관하는 역사를 미술이 살피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 미디어와 싸우는 것이 미술의 역할일까? 과연 미술이 감각과 사유를 재발명할 수 있는가? 부조리로부터 밀폐된 순수한 저항과 전복이 오늘날 과연 가능할 수 있는가? 임민욱은 미술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다.

이 낙관이 없다면 아무도 미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자신감은 미술에 대한 나의 불신과 실망을 무색하게 한다. 아니, 어쩌면 나의 비관과 임민욱의 낙관은 동전의 이면과 같은 동질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미술이 자본주의에 잠식된 것에 대한 전반적인 배신감 혹은 박탈감. 임민욱의 자신감은 폐허로부터 어렵게 추출한 작은 씨앗일지도 모른다. 나의 불신이 기대와 희망의 또다른 이름이듯이. 그것이 없다면 작가는 작업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거짓말을 할 수는 있겠지만. ‘작가론’이라는 평론적 관습이 구태여 동원된다면, ‘투사’로서의 임민욱의 이미지가
차라리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대가 여전히 부조리 속에서 고뇌하는 아티스트의 이미지를 요구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절망과 희망은 밀접하게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폐허 속의 비장함과 더불어 분노와 절망과 피폐함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임민욱의 행동주의는 익숙한 문학적 모티브들로 이루어지는 그러한 ‘작가론’에 대한 이의를 갖게 한다. 이의를 제기해야 할 필요성을 갖게 한다. 미술은 그보다는 훨씬 유기적인 교감과 담론으로 터져나와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 그의 낙관이리라. 나는 그의 낙관이 폐허 속에서 빛을 발하며 부조리의 잔재들에서 비관의 오류됨을 비춰주기를 바란다. 이 지면의 말들이 폐허 속의 빛을 반사시켜주기를 바란다. 행렬이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에 도착하는 상상 속의 순간,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이 글에 도래한다. 청구서처럼. 숙제처럼. 일침처럼.

(나는 장치의 모든 작동들을 극복하는 실재가 현현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내게 있어서, 현실과 교감은 늘 장치 속에서 작동한다. 사회적 관계들을 성립시키고 변화를 가하는 가시적, 비가시적, 언어적, 물성적 작용들로서의 ‘장치’. 내게 있어서 장치를 극복하는 ‘날것’의 현실이란 없다. 언어를 극복하는 주체는 허상이다. (언어의 극복이야말로 국가가 개인에게 강요해 왔던 행동강령이 아니었던가.) 장치에 대한 전반적인 냉철한 태도가 없다면 권력에 대한 비판은 우화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미술이 최근 재현체계로부터 탈피하는 경로에서 물성적 현존의 가치에 맹신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1960-70년대의 퍼포먼스와는 또 다른 맥락이다. 비디오아트의 태동과 결을 같이 하던 당시의 퍼포먼스 아트는 아티스트의 날것의 신체를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에 있어서 늘 재현의 문제 속에서 스스로의 행위를 파악했다. 오늘날 장치에 대한 비판적 사유 없이 새삼스럽게 매개되지 않은 날것의 신체, 날것의 존재, 날것의 교감을 주장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 미디어의 기만과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는 ‘아티스트가 여기 있다’고 선언하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수사학에 동조할 수 없다. 차라리 그것이 역설이라고 믿고 싶다. ‘연극’을 부정하는 그의 제스처는 그 어떤 연극보다도 연극적으로 보인다. 정작 그의 생동한 아우라 앞에 앉아 전율을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의 그러한 감각조차도 의문하고 말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오늘날 실재의 현현에 대한 보다 진솔하고 정밀한 재고가 필요하기 때문이고, 그 누구보다도 미술이 이를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상징 체계의 복잡한 조직 속에서 어떻게 그를 극복하는 물성적 현존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정서적, 문화적, 정치적 장치들에 의해 현존에 대한 갈망과 요구와 감각이 제조되는가를 주시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에게 정서적 교감을 실현하는 것보다 더 절박한 것은 장치의 작용을 재고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감각을 재편성하는 개체-특정적인 장치들을 다층화하고 다원화하는 것이다. 이 시대 예술에 필요한 것은 공동체를 빌미로 하는 정서의 교감이 아니라 장치에 대한 냉철한 관점이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내가 바라는 ‘정치적 행위’란, (국가가 그러해 왔던 것처럼) ‘역사적 현실’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행위를 작동시키는 장치를 새롭게 고안하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유일한 ‘교감’이 있을 수 있다면, 장치에 의해 재현되는 정서에 동일시하는 것이 아닌, 장치를 만들기 위한 협업에 동참하는 것이다. 각자의 서로 다른 안건과 필요성을 안고.)

임민욱의 방법론은 공연예술에 대해 내가 갖게 된 하나의 딜레마를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충돌을 피할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임민욱의 작품에 주목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대화를 청한다.

서현석: 과거의 작품들 중에서, 퍼포먼스라는 행위가 역사적 현실을 관통할 뿐 아니라 수행적으로 촉발시키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역사적 현실이 연극적인 장치를 통해 무대화되는 것을 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연극적인 장치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혹은 역사 그 자체에 대한 정서적 교감의 가능성을 동반합니다. 때로는 그러한 설정이 하나의 무거운 ‘요구’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불의 절벽>에서는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으로서 무대 위에 현존하는 실제 인물의 매우 실질적인 고통과 조우하고 교감하도록 유도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서 ‘연극적 장치’에는, 무대라는 공간의 특수성, 조명, 퍼포머들의 말투, 심리치료사의 개입 등이 포함됩니다. 정서와 교감은 날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치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이에 대해 어떻게 반문하실 수 있는지요? 역사와 정서, 역사와 재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임민욱: 역사 속의 개인의 경험과 기억을 다룬 것이지 사건이나 현상을 그 자체로 ‘재현’을 한 것이거나, 역사로 바라보는 게 아닙니다. 제가 정작 그 속에서 갈망하는 것은 모순에 대한 직시입니다. 범주와 잠재적인 것에 대한 자각을 통해 양가적 관점을 갖는 것이 필요했다고 할까요. 무대와 관객, 무대 위의 과거와 현재, 이걸 바라보는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보고자 한 겁니다. 어떻게 포개져 있고 연결 되어 있는가. 물론 우리가 역사를 시간의 흐름이나 개념으로 파악합니다만, 저는 이런 면에서 역사 그 자체보다는 개인과 공동체의 감각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역사의 현상을 다시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역사와 재현의 관계보다 시간과 정체성의 관계가 비로소 리셋 될 수 있는 계기가 무엇인지 재질문하고 싶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정체성, 관객과 배우의 관계,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 범주에 대한 의심 자체가 중요합니다.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되는가하는 질문은 진정성에 대한 의심과 함께 총체성에 대한 태도를 스스로 드러내기도 하니까요. 모든 이에게는 저마다의 감각이 있는 것이고 또 우리에게는 칸트가 말했던 ‘공통감’, 아렌트가 발전시킨 ‘공동체 감각’이라는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과 행위, 기억과 정서가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형성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서는 개인이나 집단의 감정이지만 공동체 감각은 누구나 공통으로 갖고는 있지만 다르게 느끼는 것이죠. 저는 누구의 정서나 또 어떤 정서의 교감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개별자의 공동체 감각을 상동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배우라는 포지션이 더 중요했습니다. 실재와 허구 사이에서 오는 깨지기 쉬운 긴장이 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공통감을 불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어떻게 고통을 이겨낸 철인이었나를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니라구요. 퍼포머들의 말투나 심리치료사의 개입도 연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연극적 장치라고 하지만 아주 미미한 음악과 조명의 사용은 리허설이 불가능한 실제 인물에게 시간경과를 알려주는 가이드라인일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고문피해자에게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당신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니 고통의 기억을 재현하려들지 말고 어떻게 일상을 영위하고 계신지 더 말씀해주시길 바란다." 면서 교감을 강요하거나 관객들에게 너무 기대하지 말 것을 부탁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정서는 장치가 없어도 경험으로 만들어지고 전파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런 정서와 교감, 감각이 완전히 따로따로 구별되거나 존재해서 개별적인 것으로 발현되는 게 아니고 연관을 지어 드러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현석: 내가 임민욱의 작품에 경의를 표하는 이유는, 나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과 의문들에 압력을 가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그와 나를 관계시키는 ‘공유’와 ‘간극’이 무한한 긴장으로 출렁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공동체’라고 부르고 싶다. 그 긴장감을 ‘동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폐허가 된 절박함. 나는 미술에 대한 불신을 녹여낼, 재현 장치의 이데올로기적 작용을 무력화할, ‘교감’이 이루어지길 갈망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교감’의 가능성에 대하여, 역사의 현현에 대하여, 그 어떤 계약적 장치에 의해 눈을 가리고 있는 희생자로서의 나를 보게 되기를 바란다. 미술의 유족이랄까. 그 현현은 육하원칙으로 설명되는 사건이나 ‘진상 규명’, ‘보상’, ‘치유’ 등의 사회적 담론으로 파악되는 역사가 아닌, 보다 사적이고 파생적인 사유의 현현으로서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과 국가가 만나는 비가시적인 장. ‘관계’를 맺는 방식 그 자체와 새롭게 관계 맺기. <내비게이션 아이디>로 인해 ‘과거사 정리’나 보상이 이루어진다면 더없이 의미있는 일이겠지만, 수행적인 역사쓰기로서의 이 이벤트가 새로 쓰는 ‘역사’는 그보다는 다른 영역에서 현현할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이 글을 쓰는 이유 역시 그러한 역사쓰기를 지지하고 갈망하기 때문이다. 관계로서의 역사랄까. ‘관계미학’으로 가장되는 모호하기 그지 없는 ‘사회적 관계’도 아니고, 미술관 퍼포먼스아트가 안일하게 안주하려는 ‘물성적 현존’도 아닌, 성찰적 현실. 사유로서의 역사. 공동체로서의 사유.

스스로를 지우는 허술한 자명함 속으로 은신하는 진실과 그에 대한 비판적 냉철함 사이 어디인가에 현재형의 역사가 있을까? 그 가능성은 아방가르드의 충격과 국가의 진부함 사이 어디인가에 혼재하고 있을까? 그 탐색을 예술이 수행할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면서 갖게 되는 갈망과 충돌의 역학을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재매개된 역사. 재매개로서의 역사.

임민욱: 역사가 역사 그 자체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역사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지금의 시간 속에서 호출되어 왔습니다. 결국 문제는 이런 전반적인 과정에 개입해있는 사람들의 이해에 따라 역사와 재현의 관계는 설정된다고 봅니다.

1)헬리콥터의 소음은 (2009)에서 유람선을 장악했던 그 긴박했던 5.1채널 음향에 대한 상호텍스트적인 인용이기도 하다.

인터뷰는 2015년 6월 이메일을 통해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