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욱: 25시(時) 여행으로부터의 기록

클라라 킴
워커 아트 센터, 시각 예술 시니어 큐레이터

서울의 도시 풍경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익숙한 것은 낯선 것으로, 연속성은 불연속성으로 대체되는 순환 속에 있는 이 도시는 지어지기가 바쁘게 파괴되는 유동적인(liquid) 건축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서울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사실이지만, 이 도시를 파악하려면 먼저 한 공간 안에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관계부터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만약 택시 기사에게 당신이 가야 할 목적지를 이야기할 일이 생긴다면, 기사는 그곳의 주소를 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에게 “아, 예전에 빌딩 x가 있었던 자리 말인가요? 지금은 옆에 있던 빌딩 y만 남았지만, 곧 빌딩 z가 들어설 그 자리요?”와 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 서울은 급속한 산업화 과정을 거친 아시아의 여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간헐 촬영 기법으로 찍은 영상의 속도로 성장해 왔다. 도로망과 대중교통 시스템, 지하 터널과 공중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도심에 지역 사회가 존속할 여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역 주민들은 생활 터전을 잃고 도시 밖으로 밀려나거나 추방되고, 셀 수 없는 개발과 재개발 프로젝트들로 인하여 뿌리 뽑힌 공동체는 갈 곳을 잃게되었다. 이 도시의 풍경은 본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성형 중독 환자의 모습을 닮았다. 도시 안에서 역사와 기억 그리고 일상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 아니라, 위태로운 이음새들로 간신히 엮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시간에 대한 나의 감각은 일반적인 과거-현재-미래의 연속성이 아닌 과거-미래-현재의 순차를 따른다”.1

이것이 바로 임민욱 작업의 출발점이다. 임민욱은 지난 15년에 걸쳐, 걷잡을 수 없는 성장과 발전을 연료 삼아 온 현대 사회의 사회적, 정치적 양상들을 비판하는 도발적인 작품들을 제작해 왔다. 임민욱은 산업화 과정에서 누락되거나 숨겨진, 침묵 속에 있으며 눈에 보이지조차 않는 주변적인 요소들 - 그가 “근대화의 유령들”이라고 명명하는 - 에 주목해 온 만큼, 소속감과 장소의 상실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녀의 작업은 시위와 같은 선언적 행위에서 애도의 상징적 의례로 거침없이 옮겨간다. 미학과 정치 사이의 선상을 의식적으로 오가는 임민욱의 작업은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고 경험하는 비평적 관점을 요구하는 반대와 이견의 공간들을 만들어 낸다. ‘정치적인 것’은 권력 관계라든가 특수한 목표의 성취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합의에 의해 유지되는 문화를 분열시키는 적극적인 과정으로 이해돼야 한다고 주장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의 글에서 큰 영향을 받은 임민욱의 작품은 랑시에르적 의미에서의 ‘불일치(dissensus)’로서 작동하며 현대 서울에 만연해 있는 정치와 선전주의의 수사적 기교를 방해한다. 임민욱에게 있어 불일치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지 및 감각 과정의 재조정을 요구하는 것, 즉 집단 기억을 다시 쓰고 우리 일상의 경험 속에 재고와 성찰을 가능케 하는 양심을 이식하여 다르게 보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의 윤리적 책무는 사실 많은 예술가의 발목을 잡고 있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나의 입장은 ‘윤리학은 미래의 미학’이라는 말을 인용한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 1930-)의 시선에 가깝다(<작은 병정 Le petit Soldat, 1963>). 진리와 미라는 쌍두마차에서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이동한 감성적 판단 관계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말은 우리의 현실 자체가 어떻게 불화를 끌어안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랑시에르의 주장처럼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감각의 재편성을 이루어야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2

임민욱은 최근의 작업에서 퍼포먼스, 비디오 그리고 다큐멘터리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도발적인 방식으로 혼합한 독특한 시각언어를 구축하였다. 페스티벌 봄의 의뢰로 제작된 S.O.S.-채택된 불일치 S.O.S.-Adoptive Dissensus, 2009는 한강을 떠도는 유람선 위에서 펼쳐진 빛과 소리로 구성된 퍼포먼스 장면을 담은 3 채널 비디오 설치 작품이다. 임민욱은 이 작품을 “퍼포먼스 다큐멘터리 극장”이라고 묘사하는데, 그만큼 다층적이며 생생한 감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S.O.S.에서 유람선에 탑승한 승객들은 (혹은 비디오 설치작업을 보는 관람객들은) 서울의 야경을 훑고 비추는 탐조등 불빛 속에서 미지의 시간, 즉 25시로의 여행을 떠난다. 연륜 깊은 유람선 선장은 이 여행의 안내원이 되어, 서울시의 ‘한강의 기적’ 사업과 같은 도시 발전 계획으로 인하여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잃어버린 역사와 기억들을 서술한다. 그리고 이 와중에 승객, 즉 관람객들은 실시간 양방향 라디오를 통해 강둑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 가지의 짤막한 퍼포먼스를 접하게 된다. 항의 중인 학생들의 집단 시위 모습, 노들섬이라는 장소에서 느끼는 감정적 유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연인, 자신이 투쟁해온 개인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비전향 장기수. 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 그리고 사회적 맥락에 위치해 있으나, 이 작품 안에서 그 맥락들은 개개인의 삶과 사적 기억의 서술과 회생이라는 공통된 목표로 집약된다. 다시 말해 S.O.S.는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과 대가를 한 작품을 통해 다시금 인간화하려는 작가의 시도이다.

“ 이 퍼포먼스는 속도가 소멸시키는 기억의 관계, 그것으로부터의 저항, 인간과 도시 속 자연의 관계에 질문을 던진다. 너무 빨리 변하는 환경 속에서 우리의 기억들은 떠밀려 사라지고 삶의 순간들은 살기도 전에 그 기억이 사라질 것을, 떠나버릴 것을 늘 준비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점점 가속화되는 ‘세계화’는 ‘이미 본 것’ 같고 ‘벌써 사라진 것’ 같은 뒤숭숭한 시공간 감으로 우리를 떠돌게 한다”.3

임민욱은 이 작품을 통해 다큐멘터리를 직접적인 참여의 한 형태로 재창조하고, 관람객을 역사 속에 묻힌 ‘반대하는 목소리’를 목격하는 증인으로서 더욱 중요하게 부각시킨다. 작가에게 있어 본다는 행위는 감각하고 접촉하는 행동과 같은 것이며, 실제 시공간을 형상화함으로써 도달하는 시학과도 같다. S.O.S.가 상실된 공간을 포착하기 위해 소리와 탐조등을 사용했다면, <손의 무게 The Weight of Hands, 2010>(Fig. 4)에서는 적외선 카메라를 사용하였다. 흔히 군대에서 감시를 목적으로 설치되는 적외선 카메라는 여기서 출입이 통제된 건설 현장을 탐색하기 위한 직접적이면서도 은유적인 도구가 된다. 일종의 장례 의식을 연상케 하는 작품 속에서 임시 체류객을 태운 관광버스는 접근이 제한된 건설 현장으로의 침입을 시도한다. 몹시 인상적인 이 영상의 중간중간에는 승객들이 한 여성 탑승객의 몸을 머리에 이어 상여를 운구하듯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기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서 승객들은 상실과 절망, 소외를 노래하는 구슬픈 애가를 부르는데, 이때 적외선 카메라는 이 장면들에서 발생하는 온도와 열을 각기 다른 색상과 채도의 추상적인 문양으로 기록한다. 이 문양들은 상실된 신체를 대신하여 신체가 있을 자리를 메우는 직접적이고도 은유적인 대역인 셈이며, 접촉과 체온과 열기와 같은 감각적 장치의 사용은 관람객인 우리에게 물리적 공간에 제약이 가해졌거나 그러한 공간이 아예 허용되지 않는 상황임을 암시하는 한편, 이러한 현실을 보고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을 일깨워 준다. 적외선 카메라의 사용은 임민욱의 이후 작업에도 등장하게 되는데, 이 기술은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요소 너머를 인식하고 인간 존재의 흔적을 추적하고자 하는 작가의 지향성을 드러낸다.

“ 내게는 오래된 이미지가 하나 있다. 말을 붙들고 울었다는 니체의 이미지다. 나는 장소를 붙들고 울고 싶은 거다. 장소가 슬프다. 뭔가 침탈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 모호한 복합적인 심정이 장소성에 꽂혀있다. 장소의 기원은 풀 수 없는 어떤 미스테리의 원천이고 슬픔의 원천이다. 지금 우리의 삶을 유지시키는 시스템은 유동자본들 아닌가. 나는 장소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끌어안고 슬퍼하는거다. 애도라는 말 자체가 흔해졌지만 슬픈 장소가 있고 그 다음에 추상적인, 형상으로 만들어야 하는 어떤 뭔가가, 계속 터치를 해야 하는 뭔가가 있는 거다.”4

매번 다른 소재와 방식으로 지금껏 세 차례 공연된 바 있는 퍼포먼스 연작 <불의 절벽 FireCliff>에서 임민욱은 도시와 신체와의 관계, 목격자와 현상의 관계, 그리고 장소성과 역사의 관계라는 종래의 관심사를 보다 확장시킨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2010년스페인의 ‘La Tabacalera(궐련 공장)’ - 마드리드의 전 담배 공장 부지에 위치한 문화 커뮤니티 센터 - 에서 선보였다. 이 퍼포먼스 작업을 위해 임민욱은 담배 공장에서 근무했던 여성 노동자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사연과 공장에서의 근로 환경, 그리고 해고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증언을 퍼포먼스로 보여준다. 임민욱은 이 ‘장소 특정적 설치 및 소리 퍼포먼스’에서 힙합 음악을 비롯한 여러 소리를 차용하고 조명 효과를 도입했다. 임민욱에게 있어 이 작업은 장소의 역사를 다시금 불러일으키려는 시도이며 새로운 것들로 인해 없어지고 잊혀진, 즉 건물 벽 속에 묻혔거나 땅속 깊이 매장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이다. 말하자면 <불의 절벽> 퍼포먼스는 위태로운 방법들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소환하는 일종의 의례인 것이다.

<불의 절벽 2_서울 FireCliff 2_Seoul, 2011>은 페스티벌 봄에서 소개되었다. 기억과 증언의 관계를 살펴보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작업은 결국 퍼포먼스 형태의 실연으로 완성되었다. 임민욱은 이 공연을 전 기무사 터에서 지금은 국립극단 극장으로 탈바꿈한 무대에서 선보였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씨와 오랜 기간 국사범으로서 수감생활을 해야 했던 양심수 김태룡 씨가 등장했고(임민욱은 ‘진실의 힘’ 재단에서 김태룡 씨를 만났다), 이로 인해 극장 공간은 일종의 다큐멘터리적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실제 인물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 관객 앞에 직접 선보이는 퍼포먼스 극이 펼쳐졌다. <불의 절벽 3 FireCliff 3, 2012>(Fig. 5)는 2012년 워커아트 센터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으로 이전보다 한발 더 나아가 안무와 춤 그리고 조각을 통합시켰다. 극장이라는 공간과 그 공간에 자리한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는 퍼포먼스와 몸동작의 특징을 부각시키고자, 임민욱은 이 작품에서 안무가와 협업하여 세상의 종말을 연상시키는 무대 주위에서 벌어지는 몸의 움직임에 기반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임민욱은 이 퍼포먼스에서 처음으로 조각을 도입하기도 했다. 비디오 작업 (Fig. 2)에 이미 등장한 바 있는 토템적 형태를 바탕으로 한 조각 연작은 물론, 착용 가능한 조각들을 작품에 포함시켰다. 이는 앙드레 카데레(André Cadere, 1934-1978)의 나무 봉과 크리지스토프 우디츠코(Krzystof Wodiczko, 1943-)의 노숙자 ‘쉼터’, 그리고 엘리우 오이티시카(Hélio Oiticica, 1937-1980) 의 ‘파랑골레(parangoles)’ 뿐만 아니라 최근에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원전 사고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낸 유기물과 합성물, 그리고 써모폼(Thermofoam)과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이 생명체를 닮은(biomorphic) 형태들은 지구종말이 임박한 상황에서 신체를 보호할 수 있는 방패와 기타 장비로서 기능한다. 임민욱에게 있어 이것들은 변화하는 권력과 통제 불가능한 야망으로 점철된 작금의 상황에서 집단 의식을 지켜내고자 하는 욕구의 표출이자 공감, 정서, 저항과 같은 더없이 인간적인 상태에 대한 지지의 표현인 셈이다.

“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극장에 선다. 나는 자궁마저도 하나의 무대 - 일종의 액체 극장 - 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나온 이후 우리는 좀 더 견고한 극장을 건설해 나간다. 삶의 절반은 허구를 연기하는 것이며 우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고려하며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역할’의 일반적의 정의에 만족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역할과 관련해 늘 비슷비슷한 질문들을 한다. 예컨대, ‘사회에서 예술가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 아버지의 역할은? 어머니의 역할은? 교수의 역할은?’ 그리고 이 역할들은 점점 더 공고해진다. 나는 과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역할이라는 개념을 재발견하고자 한다. 이것은 경계를 흐리고자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실과 허구가 공존하는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자 하는 것이다. 연극계에서는 배우를 다른 사람이 쓴 대본을 외워 대사를 읊는 일종의 도구화된 신체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그보다는 능동적인 의미로 ‘배우’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배우로서 우리는 스스로의 역할을 결정할 잠재력을 지니게 된다”.5

임민욱의 최신작인 Liquid Theater, 2012는 파리 트리엔날레에서 처음 선보인 비디오 설치 작품으로, 토템적 조각 -<포터블 키퍼>로 알려져 있는- 들과 한 편의 비디오로 구성되어 있다. 임민욱은 이 작품에서 최근 사망한 김정일(1942-2011)의 장례와 그 행렬 그리고 박정희(1917-1979)의 장례를 담은 영상 기록을 부분 발췌해 사용하고 있으며 (두 영상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닮아 있어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남한의 자살률 증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 또한 담아내고 있다. 공공장소에 모인 인파의 모습, 즉 공적인 애도의 이미지는 사적인 애도를 대체함으로써 추모할 겨를도 없이 묵인되거나 잊히고 만 이들의 죽음, 추도를 받을 권리조차 박탈 당한 이들의 삶을 가려 버린다. 임민욱은 이러한 장례 이미지가 파시즘적 이데올로기에 기반하고 있다고 해도, 인간성에 내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특성 혹은 원시성을 보이는 기제로도 작동한다고 본다.

Liquid Theater에서 그는 장례 영상과 폭발 장면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비극으로 인한 반향을 역전시킬 새로운 가능성들을 보여주는데,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 김정일의 죽음은 끝이기보다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카리브 해의 과들루프 섬에서 영상에 담은 자기 딸의 모습을 작품에 도입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열대의 땅 한국을 상상해 보려는 의도인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 배경은 김정일과 박정희의 장례식으로부터 지나치게 동떨어진 듯하지만, 실은 작가의 딸이라는 매개를 통해 구체성을 띠게 된다. 과들루프가 상징하는 열대 한국이라는 극단적인 미장센을 통해 임민욱은 옛 것(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적 야망)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 넣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진보(progress)에 대한 허울 좋은 말들과 허황된 믿음을 떨쳐내고 진정한 가능성으로 충만한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가고자 한다.

“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난 문화적 착종, 거기에 있는 원시적이고 본원적인 것, 특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을 추적하고 싶다. 우리가 보고 듣고 알고 있다고 믿는 것, 그 너머에 있는 것을 전하고 싶다. 미디어 아트의 본령이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장르의 구분을 넘나들면서 헤게모니에 반대하는 것이 미술의 본질이고 내가 생각하는 정치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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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inouk Lim, “The Heat of Shadow,” Walker Magazine (May/June 2012)
2 임민욱, 「Art Talk_임민욱: 일단 멈춤 – 실체 없는 대상에 직면하는 방법론에 대하여」, 『공간』, 2011년 1월
3 임민욱 홈페이지, http://www.minouklim.com/index.php?/works/sos--adoptive-dissensus-/
4 Minouk Lim, “The Heat of Shadow,” Walker Magazine (May/June 2012)
5 Minouk Lim, “Take-Out Performance: Minouk Lim in conversation with Jody Wood,” movementresearch (March 2012)
6 임민욱, 「Art Talk_임민욱: 일단 멈춤 – 실체 없는 대상에 직면하는 방법론에 대하여」, 『공간』, 2011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