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와의 대화 2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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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13. Vol.5 Architecture Newspaper
뱀파이어와의 대화 2탄 *
임민욱 아티스트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형체가 없었으므로, 그것은 사고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감각이 없었으므로, 그것은 영혼이 없었으므로, 그것의 단 한 부분도 물질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 모든 부재 때문에, 이 모든 불멸성 때문에, 무덤은 아직도 안식처이며 잠식되는 시간은 그 친구인 것이오” **

질문과 파문

기자: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얼마나 체류할 계획이신가요?
예술가: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먼지가 먼지로 돌아온 것뿐인데.

기자: 그럼 오늘 인터뷰의 주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입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과의 인터뷰를 실은『임박한 파국』 에서 “예술이야말로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감각의 주체로 깨어있게 한다”고 말씀하신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거기서 이번 주제에 대한 어떤 해답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늘 이 자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자유롭게 말씀해주세요.
예술가: 자유라는 공허한 멍석은 언제나 친절하게 다가와 벼랑 끝으로 우리를 모셔왔습니다. 신자유주의요? ‘어차피 죽을 인생’이란 말이 설계하는 세상에서 내 재산 내 맘대로 쓰는 게 신자유주의의 핵심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를 뒷받침할 정치 경제 노동 사회의 카르텔이 시스템 융단 (물론 자유의 카펫)을 깔아 주죠. 그런데 문제는 재산의 출처를 불문하고 네 것도 내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전문가와 지식인들이 경종을 울려왔던가요. 다 헛소리로 여겼죠… 돌이켜보면, 우리가 언제 자유주의는 겪어봤나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무색하게 모두 ‘자칭’ 자유주의를 표방해 왔습니다. 권리를 요구하는 자유는 책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이제 경쟁과 쾌락만이 설득하는 신자유주의하에서는 책임을 규제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일단 피 맛을 보게 되면 이윤율의 하락은 지루한 흡입을 초래하니까요. 그러면 ‘New’ 혹은 ‘Neo’를 앞에 붙여서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금융가를 보세요. 세계 경제를 파산시켜놓고도 공적 자금 수혈을 통해 벌인 보너스 잔치, 그때 진정한 쾌락을 맛보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아픈 사람과 집 없는 사람들의 증가는 웰빙과 힐링 관련 테마주의 강세를 점치게 했고 ‘이게 녹색경제다, 창조경제다’ 하면서 창궐하게 되었습니다. 네, 그들은 잘 알아요. 나약한 이들은 언제나 그들에게 면죄부를 준다는 것을. 언제나 특권을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며 언젠가는 자신들도 그렇게 될 때까지 목덜미를 가꾸며 충성한다는 것을. 제 목덜미에 바코드를 새기고 이론이든 통계든 앵무새처럼 외워대며 그 나머지는 지적 허영심과 위선이라 몰아붙이지요. 그래서 기득권은 탈정치를 부르짖는 자들의 피 맛이 훨씬 부드럽고 소화하기 쉽다는 것을 잘 알지요.
그런 걸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이라 부르고 세상의 질서라고 부릅니다.

기자: 목덜미를 내놓은 모습에서 포기하는 순수함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감염된 사람들은 언제 흉악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것이 잠재된 공포 아니겠습니까.
예술가: 아벨 페라라Abel Ferrara가 만든 영화 <중독The Addiction>에서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넌 나를 다치게 했어” 그러자 “너 농담하니? 난 너를 널빤지처럼 더욱 납작하게 해줄거야” 라고 대답하죠. 하지만 악 앞에서 꺼지라고 외치지 못하는 수 없는 나약함. 그게 바로 중독, 악순환의 원리지요. “나는 포기한다. 고로 존재한다. 아니, 나는 중독된다. 고로 존재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도 꺼지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벗어나고 싶지 않으니까요. 나는 괜찮을 거라고 믿으니까요. 그렇게 곤경 없는 삶, 중독된 삶, 바로 이 나약한 삶 속에서 서로서로 기생하며 평화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경보장치를 부착하고 신개념 감시카메라를 발명하면 됩니다. 그것마저도 중독의 결과죠. 저 소리 들리십니까. 옆집에 누군가 침입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알람 소리만 혼자 울리고 있죠. 누군가 나서서 확인하거나 도움을 주지는 않을 거예요. 여기 당신과 나처럼 오작동 된 거라고 믿으니까요. 알람 장치를 붙여 놓았다는 사실만으로 경계는 이미 해제된 거지요. 자유예요.

기자: 그래도 예술이 감각의 주체로 깨어있게 한다고 하셨을 때는 어떤 긴장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예술가: 가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있긴 하지요. 소용없는 사람들, 속없는 사람들, 그들은 캠프에 머물지 않고 사선방향으로 떠돌아다니며 시詩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현실을 무겁게 만듭니다. 신자유주의의 허점이자 구멍이지요. 영화 <중독>에 나오는 페이나처럼 피를 빨지 않고도 살아갈 능력을 키운 인물들이 종종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무엇으로 자꾸 말을 걸어오는 현실체들, 그들은 알려진 바가 없어서 쓸모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자신을 속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은 철학박사 과정을 마친 카트린처럼 자멸을 택하지요. 그녀가 통과파티에서 한 선언대로 배운 것을 나누면서, 고통을 나누면서 공모자답게 글로벌하게 중독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죠. 배운 것은 도둑질뿐이라고, 일시적 공동체라는 세련된 허울 속에서 언제나 남의 목 뒷덜미를 흘끔거리며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들이 동경하는 것은 주지육림酒池肉林, 그들은 사랑의 도가니라 부르지만 우리는 교육의 산실로 봅니다. 그런데 매혹스러운 순간이 덮칠 때가 있습니다. 무게의 (텅 빈) 중심이 마침내 쏟아져버리는, 무리를 떠난 이탈자들, 편안함이 결여된 성질들이 여태껏 내가 견지하고 있던 위치와 방향을 상실케 하며 나를 끌어들이고 말려들게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시’ 라고 부르는 열림의 순간. 종말은 불가능해지고 긴장의 복화술이 펼쳐지지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주체도 대상도 사라진 시에 결핍과 초과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시’ 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거예요. 신자유주의의 전횡은 결핍과 초과로 구원될 것입니다.

기자: 시가 무슨 혁명입니까? 예술생산과 신자유주의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술가: 예술품 생산과정을 시와 비교하면서 신자유주의에 맞게 저렴한 상상력으로 치환시켜 이야기해 볼게요. 경제시스템에서 신자유주의의 기본을 보자면 기업은 그 자체가 투자 상품입니다. 바꿔 말하면 예술가도 기업인 것이죠. 그 기업은 투자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경영돼야 하겠죠?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세계적 작가들은 투명하게 개념을 설명하고 가치를 홍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매체와 인맥관리에 매달립니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인 경쟁과 욕망에 충실한 탓이죠. 그 안에서 예술가는 잠재적 투자자로 볼 수 있는 컬렉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창작물을 내놓습니다. 예술품이 인테리어 디자인처럼 제작되는 경향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고요. 또한, 기업가들이 경영가치를 높이기 위해 외주를 주고 외국 판매에 열을 올리듯, 예술가들도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실적(전시)을 올리기 위해 직접 창작하기보다 스튜디오를 굴리고 국외를 돌아다녀야 합니다. 이러한 창작방식에 대한 윤리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는 작품 의도에 역으로 윤리적 기준을 이슈화하고 공동체를 들먹거리거나 협업이란 이름으로 유명인들을 조합하지요.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등장한 사회적 기업과 비슷해요. 그래도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화 시대에 이윤율의 보증은 추상이 가장 안전한 상품입니다.
그런데 시가 무슨 대안이냐구요? 신자유주의의 성공은 책임의 외부화에서 비롯되지 않습니까? 미술은 시와 달리 거기 있어야 가능합니다. 미술은 성스러운 맥락을 떠나서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변기는 변기일 뿐입니다. 반면에 시는 허무를 통해서만 작동되는 초과의 원리에 따라 도주를 근간으로 하므로 신자유주의처럼 ‘책임은 언제나 너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항상 거기 없습니다. 이러한 근원적인 도주를 행동을 회피하는 말들의 잔치로 봉합시켜버린 것은 현실정치입니다. 거기에 시는 없었습니다. 작가들은 ‘신중’ 개념을 현명한 처세로 오해했다지요. 언제나 쇼를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가 문학을 너무 물신화시킨 탓도 있겠지요. 신자유주의가 마련한 ‘누구나 예술가’, ‘모두가 연예인’이 된 무대에서 이젠 아무도 퇴장하려 들지 않습니다. 모두가 VVVIP룸을 갈망합니다. 단순한 삶과 고독 예찬은 바쁜 자들이 멋부리기 위해 해대는 낭만적 훈시가 되었죠. 숨으려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신중합니까. 그런데 시詩가 숨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동시적이고 다중적인 관계로 오로지 하나만이 가질 수 있는 상징을 해체하며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시가 해야 할 일은 하루빨리 세속화되어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일삼아야 합니다. 비틀거리고 묻어버리고 재난을 가속하는 일, 신자유주의를 시적으로 보여주기, 그래서 막상 재난이 닥치고 헐벗게 되면 가난한 자들의 마지막 감자를 구걸하러 가는 일. 임시변통으로 물어뜯고 씨(시)를 뿌려대는 삶. 마침내 자유로 세속화된 시詩.

물린 자의 몫

“(…)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

기자: 당신이 점점 무서워집니다.
예술가: 절대 그렇지 않을 겁니다. 내가 이렇게 당신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허벅지 위에 손을 얹으면 숨을 가쁘게 몰아 쉬며 ‘계속해요’ 라고 중얼거리지요. 그만하라고 해 보세요. 흥분하는 걸 보니 당신도 이미 향수에 젖어 있군요. 취약한데도 보장받는 공동체의 원인은 향수 때문이지요. 사랑과 믿음과 가족과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중독시켜온 향수. 그러나 이제는 향수에서 벗어나 신자유주의를 시적으로 말하기에 피땀 흘려야 할 때가 왔어요. 그것은 고통의 간섭 없는 사유화, 온갖 엄숙한 장치들을 삼켜버려 구조조정 하기.
우리의 수동성은 열림의 원천입니다. ‘미워도 다시 (없는) 한번’의 채찍질을 하면서 말의 목덜미를 껴안고 슬피 우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그동안 아무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 비인칭이 되라고 가르쳐주지는 않았죠. 예술이 끝났다고만 하면서요. 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이제 어떤 대안이 보이십니까. 한 가지 더, 신자유주의의 뱀파이어들은 깨어있을 때와 잠들어 있을 때를 노출하지 않습니다.
자, 그럼 다음 질문은 물린 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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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민욱은 ≪도시와 영상-의 식 주≫ 전시(1998) 도록에
“뱀파이어와의 상상 인터뷰, 1998”라는 글을 실은 적이 있다. (http://www.minouklim.com 참조) 이번 뱀파이어와의 대화는 본지의 ‘이슈’ 란을 위해 새롭게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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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모노스와 우나의 대화
The Colloquy of Monos and Una』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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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바람의 집-겨울판화 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