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장소를 찾아서:
촉지적 시각과 새로운 심미적 성찰성

김영옥

1. 미학의 현장: “시가 나에게는 공공미술이다”
살아남은 자는 슬피 울며 죽어 지내는 것이 상책이란다.
돼지도 죽고 하이에나도 죽고
선한 자도 대통령도 금관을 머리에 이고 죽어도
하늘님은 머리가 나빠 기억을 못하시니
하고 싶은 말은 나쁜 시가 되어
방방곡곡 삼천리에 대통하거늘
이것이 진정 독재렸다
예술의 독재렸다.
좋은 시도 다른 시도 아닌 나쁜 시가 흐르거늘
머리만 아홉인 예술은
혀는 잘리지 않고 이 뭣고 무상함
다다가 아니라 따따붓다로세
초로에 고름짜내기~ — 1

나는 지금 가장 최근에 들려온 임민욱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2009년 겨울 돼지들이 산채로 구덩이에 내던져지는 장면은 수개월 동안 한국 사람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수많은 절규를 만들어 냈다. 지난 몇 년 길지 않은 시간동안 많은 죽음이 있었다. 구제역으로 돼지와 소가 떼죽음을 당했고, 두 명의 대통령이 그리고 평범한 소시민들의 채 고갈되지 않은 윤리적 감각을 의미하던 신부님과 스님도 이곳을 떠났다. 결혼이주여성들이 살해되었으며 해고된 노동자들이 목숨을 끊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아니 수치스러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들. 죽은 생명들의 마지막 삶의 숨결이 혹여 내 꿈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지나 않을까 - 살아남은 자들은 ‘좋은 시도 다른 시도 아닌 나쁜 시’로 자기만의 제의를 벌인다. “시가 나에게는 공공미술이다”라고 어디에서건 몇 번이건 또박또박 말하는 임민욱은 살아남은 자들과 죽은 생명들 모두를 초대해 굿판을 벌인다. 자신의 시는 ‘나쁜 시’가 아니라는 자신감 때문이 아니다. ‘나쁜 시’라는 그 오염된(contaminated), 협상된(negotiated), 혼종적(hybrid) 정체성 속에서라도 발언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약자들과의 연대’ 방식이라고, 그것이 바로 ‘공공미술’을 하는 자신의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당한 존재들, 슬픈 존재들에 끌린다. 작업을 할 때 기쁨이 아니라 슬픔을 느끼는 힘이 더 크게 작용한다.”

2. 슬픈 장소: “나는 장소를 끌어안고 울고 싶다”

임민욱은 2005년 «Public Peeling»전시에서부터 2007년 에르메스 미술상 후보전인 «너무 늦은 혹은 너무 이른, 아뜰리에», 그리고 2010년 «꼬리와 뿔»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도시의 표면을 라텍스로 떠내는 작업에 몰두한다. 그녀는 공공시설물들 중 맨홀 뚜껑이나 전봇대 표면 등을 라텍스로 떠냄으로써 도시라는 거대한 추상적 영토를 구체적인 살덩이로 지각가능하게 만들고자 한다. 여기서 ‘몸으로서의 도시’는 단순한 비유나 유추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 규정하고(define) 기입하는(inscribe) 관계에 있는 몸과 도시가 만들어내는 접촉면(interface)을 가리킨다. 도시는 그 특유의 지리적ㆍ건축적 배치 속에서 상이한 사회적 행위들, 경제적 흐름, 권력의 망, 정치적 조직, 상호주체적 관계들, 공간과 장소의 미학적 구성을 연결시키는 복합적 네트워크다. 인간의 몸은 이러한 도시 속에서 사회적ㆍ담론적으로 만들어지며 각각의 몸은 다른 몸들이나 대상들과 연결됨으로써 사회적 망의 일부가 된다. 즉 인간의 몸은 살과 기관들, 신경과 뼈로 이루어진 물질적인 조직일 뿐만 아니라 성적 욕망과 사회적으로 코드화된 의미들이 새겨진, 독해 가능한(readable) 실체(entity)인 것이다.— 2 상이한 도시, 상이한 사회-문화적 환경들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몸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몸과 도시, 그리고 정치적 통일체로서의 국가(the body politic)는 어떤 수사학적 논리로 서로 연결되며 어떻게 서로 영향을 끼치는가(affect). 몸의 정치학(politics of bodies)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질문은 임민욱에게서 매우 독특한 미학적 실험과 도구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한국사회에서 아티스트로서 작업하기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임민욱의 작업을 관통하는 정신(spirit) 혹은 입장 중의 하나는 ‘장소/성(place/ness)’과 관련된다. 그녀에게 장소는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는데 이미 빼앗겨버린 어떤 곳이다. 임민욱의 도시는 ‘한강의 기적’으로 비유되는 개발 중심의 압축적 산업화와 근대화 속에서, 그리고 이어지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흐름 속에서 장소성(placeness)을 상실한 장소를 가리키는 한편, 특정 장소와 지속가능한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들의 부유하는 삶과 정체성의 혼란을 환기시킨다. 이렇게 임민욱의 라텍스 도시-피부는 살아낸-살아내지 못한 삶을 기억하는 동시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삶을 불러낸다.

“내게는 오래된 이미지가 하나 있다. 말을 붙들고 울었다는 니체의 이미지다. 나는 장소를 붙들고 울고 싶은 거다. 장소가 슬프다. 뭔가 침탈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 모호한 복합적인 심정이 장소성에 꽂혀있다. 장소의 기원은 풀 수 없는 어떤 미스테리의 원천이고 슬픔의 원천이다. 나는 지키거나 문명의 쟁기로 경작할 수 있는 그런 장소를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삶을 유지시키는 시스템은 유동자본들 아닌가. 나는 장소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끌어안고 슬퍼하는 거다. 애도라는 말 자체가 흔해졌지만 슬픈 장소가 있고 그 다음에 추상적인, 형상으로 만들어야 하는 어떤 뭔가가, 계속 터치를 해야 하는 뭔가가 있는 거다.”

비-장소로서의 도시. 임민욱의 라텍스-피부는 정서적 애착은 삭제된 채 기술적인 관리와 경제적 흐름, 사회문화적 담론, 독단적인 국가 통치성의 거대한 네트워크로 존재하는 이 도시-기계를 ‘촉각적으로’ 전시한다. 이러한 촉각적 바라봄을 통해 관람객들은 의미 있는 서사가 가능한 삶이란, 개인의 차원에서나 공동체의 차원에서나, 장소에 스며든 시간의 흔적, 즉 속도로 대치되거나 생략되지 않은 장소의 육체성(corporeality)과 상관관계에 있음을 지각하게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남겨지는 것은 산업화를 이룬 독재자 박정희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다룬 <잘못된 질문>에서 택시 기사가 보여주듯이 ‘대한민국 성공 신화’에 대한 공허한 향수일 뿐이다.

3. 개념(concept)에서 지각(perception) 으로: “열 카메라를 쓰고 보니 세상이 다 열 받은 사람이다”

임민욱의 작업들이 ‘이미 사라져버린-아직 도래하지 않은’ 어떤 장소에 대한 치열한 전투로서의 애도-불러냄이라고 할 때 이 전투는 버틀러(Butler)가 폐제(foreclosure)의 구조, 즉 ‘상실함으로써만 간직할 수 있는’ 이라는 공식으로 명명한 멜랑콜리(Melancholy)와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3 이것은 후기식민공간에서 진행된 근대화에 내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도’에서 점점 더 ‘불러냄’으로 그 간곡함이 이동하면서 그녀의 수행적(performative) 아트 작업은 실제로 사람을 장소로 전이시키는, 그것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 아트와 사람 사이에 장소/성이 생성되는 어떤 장소 생산적 매개물이 된다.(place creating medium, which transfer persons into places and through which place/ness originates between person and person, person and art)

“그래서 이포보 가서 The Weigh of Hands 를 찍을 때에도 밤에 가서... 그곳의 진흙을 밟으면서 일시적인 기억을 ‘생성’시키고 다시 전유하는 것을 시도했다. 찍었으니까 퍼포먼스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다시 기억할 수 있는 장소, 그렇게 장소에 사람을 개입시키는 거다. 그런 관계를 상정해봄으로써 나는 장소의 피해자를 장소의 주인공이 되게 하고 싶었다. 나는 대전 대흥동에서 태어났다. 1년 전엔가 가보니까 The Weigh of Hands 를 찍은 이포보처럼 폐허가 되어 있더라. 낀 세대로서 내게는 장소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래서 작업으로서 굿, 푸닥거리를 한다. 약간은 역설인데 그러한 슬픔을 제의 같은 걸로 표현하면서 역으로 장소를 불러내는 거다. 예전 사람들의 씻김굿이 잘 가라는 굿이었다면 내 작업은 오라는 굿이다.”

장소를 불러내고, 사람들에게 장소와의 애착적(attached) 관계를 되돌려주기 위한 임민욱의 오랜 작업은 열 감지 카메라라는 새로운 매체를 만나 흥미로운 미학적 열림을 경험하게 된다. “현실이 너무 세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센 현실’이야말로 그녀가 약자의 발열에 민감할 수 있는 토대다. <스무고개: 장마 도깨비 여울 건너가는 소리>가 보여주듯이 이름짓기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그녀의 작업은 개념적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센 현실’에 강타당하는 약자나 소수자, 살해당하거나 실종 중인 생명에 대한 감응(affection)에서 출발하는 그녀의 작업은 정동적 지각(affective perception)을 매개로 한 성찰성을 지향해 왔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간극에 주목해 왔던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감각의 (재)발견/발명이다. 타자에 대한 배려의 감각이 전이되는 몸체로서의 작품을 추구해온 그녀가 적외선 카메라를 만난 것은 그러므로 우연이 아니다. 예술의 실천은 재료나 도구의 선택 및 그 사용방법과 상호의존적이며 구성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적외선 카메라를 통한 촉각적 시각 예술의 실천에서 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는 곧 체현(embodiment)의 문제가 된다.

"내가 생각하는 미디어아트는 하나의 입장표명이다. 내 작업은 인간에 관한 관심에서 시작되는데 나는 인간 자체가 미디어라고 파악하고 작업하고 있다. 보통 미디어 아트하면 하이테크놀로지 매체를 사용하는 작품들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사람 자체가 미디어라고 판단하고 내가 보고 해석하고 관찰한 것을 다시 제안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 4

적외선 카메라는 ‘적’을 색출하는 무기, 혹은 공업용 카메라다. 이 카메라를 손에 들고 적을 찾아 나선 사람의 시선은 차갑다. 그러나 임민욱은 이 ‘무기’로 발열체들의 공생 가능성을 아니 필연성을 확인한다. The Weight of Hands와 FireCliff 1, FireCliff 2에서 사용된 적외선 카메라의 이미지 작업은 시각을 비롯한 근대적 의미론(semantics)과 기호학(semiotics)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아니 다 싸서 끌어안으면서 촉각적인 새로운 기호체계로(semiology) 전이시킨다. 벤야민(Benjamin)의 언어철학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무생물이든 생물이든, 자신의 존재성을 발화한다. 그것이 바로 언어의 존재론이다.— 5 존재하는 것들이 발화하는 그 존재성에, 그 자기표현에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언어행위의 토대다. 임민욱은 바로 이 존재성의 발화를 열로 감지한다. ‘열 받은 상태에서 열을 방출하는 존재’라는 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존재성 자체가 상호주체적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열 감지 카메라의 이미지는 사물들과 생명체들의 이러한 상호주체적 존재성을 촉각적으로 드러낸다.
남근이성중심주의(phallogocentrism)가 일방적으로 주장해온 시각중심주의에 대한 여성주의적 거슬러 읽기를 해온 이리가레이(Irigaray)는 촉각이야말로 시각을 가능하게 만드는 근본 감각임을 강조하면서 촉각에서 출발해 시각성을 새롭게 개념화할 것을 주창한다. 데카르트적 원근법주의에 따른 시각중심주의는 몸의 개입이나 작품과 관객 간의 상호작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탈신체화되고 추상화된 ‘봄’은 견고한 고체의 논리를 따르며 고립된 개체들 간의 공간적 거리를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해 촉각은 매개적(intermediary)이고 정동적이며(affective) 유체성의 논리(logic of fluid)를 따르기 때문에 인접성(proximity)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사잇공간(in-between)의 성격이 강하다. 이리가레이가 제안하는 ‘촉각에 의해 매개된 시각’은 빛의 질료성, 빛의 감촉에 의한 ‘봄’으로서 각각의 형상을 그 기원으로 즉 촉각적인 기원으로 되돌린다. — 6
열 감지 카메라를 활용한 임민욱의 작업은 촉각에 의해 매개된 시각성이 어떤 심미적 체험의 변화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준다. The Weigh of Hands나 FireCliff 2의 이미지들은 생성 중인 어떤 사건으로서 감지된다. 이 작업들은 넓게는 문명화 과정이 지워버린 어떤 원시적 소통, 연민(compassion), 공감의 회복을 지향하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한국 근대사의 맥락에서 정치적 폭압과 개발주의 경제에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연루될 수밖에 없었던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공동체성을 신체적으로 환기시킨다. 이러한 신체적 환기는 보다 지속적이고 윤리적인 반성의 상태로 관람객을 이끈다.

“열이라는 것으로 내가 환기시키고 싶은 것은 촉각적 접촉을 계속 앗아간 문명의 흐름이다. 어떻게 촉각적 접촉을 제시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적외선 카메라를 만났다. 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이미지들은 화로를 연상시킨다. 연기도 나는 것 같고 손을 대면 뜨거울 것 같다. 일차적으로 그러한 뜨거움의 느낌에 매료되었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행동이 있는 형식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데 관심이 쏠렸다. 고문피해자분을 직접 만나 그의 경험을 들으면서 나는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그의 경험을 나의 사적인 경험과 또 다른 타자들의 경험과 함께 집단적으로 그러면서 시적으로 발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러한 시적 발화에 촉각이나 온도의 구체성을 되돌려주는 것. 그와 같은 촉각적 집단 경험의 교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 “어떻게 보면 내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이중적인 상황을 치안의 무기로 쓰이는 열 카메라로 표현하고 싶었다. 기무사 호송대 건물에 가서 그 장소를 열 카메라로 ‘색출’하니까 예전의 역사와 기억들이 환기되는 계기가 되더라. (봄 페스티벌에서) 관객을 찍을 때에는, 함구했던 우리들? 아니면 같이 연루되었던 우리들 모두가 항상 37.5도로 나타나는 어떤 공동체적인, 비슷한 톤과 색과 열 덩어리들로 나타나는 일종의 일시적인 커뮤니티, 이런 것들로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적외선 카메라를 사용하는 임민욱의 미디어 아트는 ‘해석에 반대한다’(수전 손탁) 혹은 ‘해석의 영역에서 힘의 영역으로’(들뢰즈)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어떤 미학적ㆍ철학적 움직임과 맥을 같이한다. 여기서 주창되는 것은 의미의 논리(logic of sens)가 아니라 감각의 논리(logic of sensation)고, 담론적 차원에 속박되어 있는 기표(signifier)가 아니라 감응과 힘들의 관계로서의 기호(sign)다. 열 감지 카메라로 포착된 사물/사람은 기존의 상징적 담론체계로 환원되어야만 비로소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표현된 그 자체로 어떤 감응을 전달하며, 이 감응을 통해 새로운 사유를 촉발시킨다. <불의 절벽 2>에서 반공 독재 정권의 고문피해자가 무대 위에서 가까스로 전하는 고통스런 고백을 마주한 관람객들이 37.5 도의 열 덩어리로 일시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붉은 열 기운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바로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라는 그 이중적 국민성을 부인할 수 없는, 아니 기꺼이 고백하는 어떤 윤리적 주체의 생성이다. 탈신체화된 담론적 정치 해석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러한 육체적 반성이야말로 여전히 ‘우리 한국국민’의 의식적ㆍ무의식적 삶을 구속하고 있는 한국 근대화의 모순과 제대로 대면할 수 있는 토대다.

4. 미학의 정치화: “정치의 유일한 희망은 미학이다”

“미술은 안 보이는 걸 들춰내는 거고 미디어는 언급되지 않은 것을 들춰내는 거다....나는 금기사항들, 용기를 필요로 하는. 노래로 불러져야하는데 이미 잊어버린 것들 ... 이미 사라진, 이미 본 것 같은 것들 ... 이런 것들을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었다. ... 작품의 발로가 그런 거 아닌가. 부재하면 할수록 더 강해지는 마티에르에 대한 욕망. 만지고 싶고 냄새 맡고 싶고 더 강하게 짓이기고 싶은 마티에르. ...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의미에서의) 무엇을, 누구를 위하여가 아니라 희로애락, 생로병사, 사랑을 위하여 작업하고 싶다.”

임민욱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장소/성의 상실과 기억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집요하게 미학적 실험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그녀에게 예술 하기(doing art)가, 지켜야 하고 경작할 수 있는 장소를 ‘불러내는’ 연희(performance)가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인간은 구체적인 장소에서 일하고 지각하며 사람/사물들과 상호관계를 맺고 그럼으로써 공간을 생산하고 또 자신의 정체성도 만든다. 그러나 철저하게 초국적 자본의 논리에 따르는 지구화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물리적 지역들을 자본의 거대한 추상적 공간으로 환원시켜 버리고 장소의 거주(inhabiting of place)를 임시적이고 우연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많은 여성주의 미학 이론가들이 강조했듯이 ‘어떤 장소에 거주하는가’라는 질문은 ‘어떤 몸에 거주하는가’라는 정체성의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은 정체성의 포피(envelopes of identity)에 대한 우리의 지각과 개념의 변화를 요구한다. — 7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속도가 공간을 무한정 압축시켜버리고, 전자적 소통이 육체적 만남을 대체해버리는 현재적 시점에서 정체성의 포피와 장소에 기반을 둔 관계성은 가장 도전적이고 중요한 미학적ㆍ정치적 질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임민욱의 촉각적 예술실험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미학적 대응이다.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만져서 전달할 수 있는 열의 전도체를 향한 임민욱의 미디어아트는 예술실천과 정치학의 관계를 다시 ‘처음처럼’ 질문한다. 미학은 무엇인가. 예술작업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그녀의 작업은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시대로 이행하고 있는 중이다. 이 길의 표지판에는 ‘사랑을 위해 작업하고 싶다’는 말이 새겨져 있다. 문화와 예술이 사물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의 온도를 채워 넣는 일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1 Poly History: Text@Media, 20 Jan, 2010. Seoul Art Space, Seogyo.
http://www.minouklim.com/index.php?/exhibitions/poly-history
임민욱 작사-폴리 히스토리 아니리 대사 가운데
— 2 Elizabeth Grosz (1995), “Bodies-Cities”, in Space, Time, and Perversion, pp. 103-110, Routledge, New York.
— 3 Judith Butler (1997), The Psychic Life of Power, Stanford University Press, California.
— 4 제1회 미디어아트코리아상 수상 인터뷰. http://www.minouklim.com/index.php?/interview--articles/--/2/
— 5 Walter Benjamin (1977), “Über Sprache überhaupt und über die Sprache des Menschen”, in Gesammelte Schriften, Bd II.1, 140-157. Frankfurt am Main.
— 6 김지혜 (2008), <루스 이리가라이의 촉각성에 근거한 시각의 재개념화>, 이대 대학원 박사학위 청구논문.
— 7 Luce Irigaray, An Ethics of Sexual Difference. trans. by Carolyn Burke and Gillian C. Gill. London and New York: Continumm,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