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mp Cut : Back to the Future

김성원

점프 컷 I : 통로와 희생

삼단 유리계단의 거대한 구조물이 앞에 있다. ‘성전’을 향한 계단과도 같이 웅장하고 경건하게 느껴지는 이 구조물의 제목은 <통로-점프 컷>. 이 통로 끝에는 산산이 부서진 유리 파편들이 기다리고 있다. ‘점프 컷’은 통로를 구축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파열시키기도 한다. 한 쪽 옆에서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2시간이 넘는 영화 ‘희생’이 8분으로 편집되어 상영되고 있다. 타르코프스키의 원작을 점프 컷만으로 편집한 이 <희생-점프 컷>은 원전의 흐름을 파괴한다. 구축한 것이 파열되고 원전이 파괴된 이 두 작품에는 그 어떤 긴장감과 불안정감이 흐른다. 희생을 통한 인류의 구원을 주제로 전개되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느리게 흐르는 시간과 함께 실어증에 걸린 소년, 죽어 가는 나무, 기다림, 회생, 종교, 3차 세계 대전, 구원 등 다양하고 복합적인 상징들이 연결되며, 구체적 희생부터 추상적 희생에 이르는 ‘희생의 본질’을 사유하게 하는 대서사시다. 물론 이 모든 상징들은 절제된 시적 언어와 영상 기법을 통해서 ‘구원과 희생’의 시학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그런데 임민욱은 이 ‘희생’의 대장정 서사시를 초고속으로 점프 컷을 하며 8분으로 압축한 것이다. 원작의 흐름을 뛰어 넘고 잘랐으니 당연히 원작은 왜곡되었다. 하지만 원작의 왜곡이라는 단순한 비판 혹은 <희생-점프 컷> 편집의 성공 여부를 넘어서, 작가는 왜 원전을 의도적으로 점프 컷 했는가에 대해서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희생-점프 컷>은 그 어떤 전체적 흐름을 왜곡하는 과정에 대한 환유법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것은 전체의 파악보다는 부분들, 본질보다는 표피적인 것들의 드라마틱한 연결을 부각시킨다. 그러니까 본질을 못 보고 전체를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일종의 인식장치와도 같다. 이 장치는 건너뛰기를 거듭하며 발생되는 결여된 부분들에 대한 상상의 자유를 허용하게 된다. 그리고 희생이라는 원전을 대상으로 시도한 의도적 왜곡행위는 역설적으로 희생의 본질에 대한 사유도 가능하게 하며 동시에 그 왜곡과 거기서 파생되는 결핍까지도 가시화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희생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한 시인의 조용한 발언, 그 발언이 예술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은 이 전시에서 펼쳐질 임민욱의 시대비평적 입장과 솔직한 발언의 당위성을 상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점프 컷 II : 엄마의 전투

세 장의 카펫이 벽에 걸려 있다. <알라딘>이란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새마을 운동 로고, 고속도로 인터 체인지 싸인, 차로의 유턴 싸인을 인조모피 위에 새긴 것이다. 새마을 운동 로고, 인터체인지, 유턴 싸인 그 자체는 그다지 흥미로운 이슈는 아니다. 반면 그 싸인들이 인조모피와 결합되고 카펫이라는 실용적 오브제로 거듭나는 순간, 이 싸인들은 현재와 병행 가능한 소통경로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이 세 장의 카펫은 섬유 수출로 시작해서 IT강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성공 사와 그것을 위해 인조 모피 위에서 먼지를 뒤 짚어 쓰고 털을 깎아내던 여공들의 ‘희생’에 대한 사회적 기억으로 전환되면서 동시에 개발경제와 압축성장의 주역인 ‘새마을 정신’은 과거에 정지된 것이 아니라 인터체인지를 통해서 살짝 빠져나가기도 하고 유턴도 하며 변화된 모습으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대화를 할 수 있다. 전시장 한 가운데 몸뻬를 쿠션 겸 의자로 디자인한 <엄마의 전투>가 우리 시선을 끈다. 몸뻬 바지…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신세대’에게는 아마도 또 다른 패션쯤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일제 시대 때 부녀자들의 막 노동을 위해 만들어 진 몸뻬, 이 몸뻬가 할머니와 엄마들의 일상복이자 노동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몸뻬는 여성이기를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 주었던 ‘엄마들의 고귀한 희생’이며, 또 몸뻬 주머니에서 잔돈들과 군것질 거리를 꺼내주던 우리의 ‘할머니들의 푸근함’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그 엄마의 희생과 할머니의 푸근함이 배어 있는 몸뻬 위에 앉아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축제를 바라보고 있다. 몸뻬가 쿠션으로 전환되면서 사회적 기억과 개인적 추억은 더 이상 기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기억은 이제 지금 여기에서 이주노동과 다문화 사회가 던지는 당면과제를 고민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

점프 컷 III : 장마 도깨비 여울 건너가는 소리

한 때는 우리도 중동, 독일, 베트남 등지에서 가족과 자식을 위해서 자신 삶을 희생한 우리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발판으로 세계경제에 편입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덧 글로벌 시대를 맞으며 국제 노동력의 ‘이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주’와 노동’이라는 경제/문화의 쌍곡선에서 발생하는 ‘배타’, ‘차별’, ‘소외’에 대한 복합적 문제들이 외면당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하게 된다. 임민욱의 <스무고개: 장마 도깨비 여울 건너가는 소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다문화 축제’ 현장에서 찍은 15분짜리 동영상 작품이다. 물론 이 다문화 축제를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정치적 제스처로 비판할 수도 있고, 사회적 소외계층의 게토화를 조장하는 시스템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임민욱이 이 다문화 축제를 어떻게 우리 삶과 연결 짓는가에 있다. 작가는 여기서 집단 속의 개인을 생각하고 외국인들 속의 이방인을 보며, 이질성과 동질성의 갈등을 보게 한다. <스무고개: ‘장마 도깨비 여울 건너가는 소리>는 정체불명의 민속음악과 일렉트로닉 사운드 리믹스를 배경으로 다양한 국적의 전통의상, 다양한 종교, 다른 피부 색, 동양인인 것 같기도 하기고 서양인인 것 같기도 한 해 맑은 어린 소녀의 순순한 시선, 길 잃은 잡종 애완용 기니 피그가 투 채널 화면에서 서서히 서로 교차하기도 하고 병행한다. 그리고 아리송한 스무고개 질문들이 하나씩 나타난다. 자 지금부터 ‘나’, ‘타자’, 섞임, ‘다름’ ‘차이’의 수수께끼를 풀어보자. ‘장마 도깨비 여울 건너가는 소리’의 관문을 차례로 넘어가면서 우리는 과연 어떤 답을 발견하게 될까?...

점프컷 IV : 한강의 기적

그런가 하면 바로 뒤에는 추억의 ‘각 그랜저’가 분수가 되어 물을 뿜어내고 있다. 이유 없이 각지고 길게 뻗어 부담스런 이 ‘각 그랜저’는 여기서 단순히 ‘철 지난’ 자동차가 아니다. 먼저 이 ‘각 그랜저’는 70년대 ‘포니’ 성공시대와 오버랩 된다. 동시에 ‘한강의 기적’과 함께 찾아 온 풍요로운 경제와 소비시대를 떠올리게 하며, 권위주의와 허례허식 그리고 민주화 시위가 교차하는 우리의 80년대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다. 기적에 들뜬 나머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던’ 90년대까지도 반영하는 듯 이 ‘각 그랜저 분수대’는 바로 기적을 이뤄 낸 한강에 빠져 허우덕 거리며 물을 뿜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닐지…… <한강의 기적>이라는 다소 비장한 제목의 이 ‘각 그랜저 분수대’가 한강 주변의 한 광장에 놓인 것을 상상해 본다. 공공장소의 ‘기념비’로서도 손색없는 제목이다. 유럽 후기 산업사회의 허와 실에 대한 함축적 비평과 산업사회 폐기물이 시대를 대변하며 문화적 아이콘으로 거듭난 50년대 세자르의 자동차 ‘압축’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임민욱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기념비를 세우기 전에 이 각 그랜저와 함께 일종의 ‘순례’를 떠난다. 장마비가 쏟아지는 날 작가는 이 자동차에 붉은 색 안료를 뿌리고 개인적 소망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라져야 할 단어들을 붙인 다음 ‘자유로’를 맘껏 달린다. ‘피 눈물’을 흘리듯 붉은 색 안료가 빗 물에 흘러 내리고 그 단어들은 비바람에 휩쓸려 사라져 버린다. 그리곤 작가는 “더는 장마의 끝을 알리지 않기로” 라는 아리송한 문장과 함께 순례를 마친다. 전시장에는 단지 이 순례의 흔적들만이 걸려 있다. 한 시대를 대변하는 각 그랜저의 사회적 기억들은 이렇듯 임민욱의 퍼포먼스를 통해서 개인의 체험으로 전환되며, 이렇게 사유화된 공공의 기억은 <한강의 기적>이란 이름으로 재 탄생하게 된다.

점프 컷 V : 카니발

우리들의 개인적 소망을 하늘로 날려 보내고 없어져야 할 단어들은 비바람에 사라졌다. 작가는 또 다른 ‘단어’들의 출현과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를 <카니발>로 초대한다. 카톨릭이 이교도를 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던 카니발, 40일간의 금식 전에 마음껏 먹고 마시는 축제, 각자가 믿는 우상을 섬기고 풍요를 기원하는 이 카니발에서만큼은 종교, 민족, 피부색, 빈부, 서열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하나’가 된다. 임민욱은 이 시점에서 이러한 이 카니발의 ‘원형’을 기억하고자 한다. 이것은 곧 상호교류와 공동체적 삶에 관한 문제로 연결된다. 이 <카니발>은 전시 공간 여기저기에 우뚝 서 있는 게시판들로 구성되어 있다. 뉴스와 정보들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던 게시판들은 누구든지 원하면 그 내용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변형할 수 있고 새로운 형태로 전환 할 수도 있는 ‘장치’들로 변신한다. 이 ‘장치’들과 함께 우리는 또 다른 ‘단어’나 ‘형태’들을 만들 수 있는 능동적 주체가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만들어 가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변화 가능하며 다른 이야기들과 섞이게 되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탄생시키다. 어떻게 섞일지 예측 불가능하지만, 다양한 색들이 번지면서 자연스럽게 섞이는 ‘컬러 마블링’의 의미를 되새기며 임민욱은 우리에게 섞이고 나눠지면서 탄생하는 다양성의 공존에 대한 ‘폴리틱’을 제안하고 있다. 다가오는 새로움에는 전율을 느끼지만, 우리 바로 옆에 있는 ‘다름을 나누는 것’에는 인색한 우리에게 <카니발>은 타자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수용하며 현재에서 “함께 살고”와 “함께 하는” 현대인의 ‘공동체적’ 삶의 방식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점프 컷 VI : 제안과 전망

이 전시는 60년에 이르는 우리의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문화 그리고 정치경제적 ‘현상과 그 문제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대비평적 입장이다. 언제나 작가의 머리 속에 꽉 차 있는 우리 근대사의 모순들, 그 모순들과 함께 살면서 발생하는 불만과 갈등,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든 소화하려는 애정과 관용이 표출되는 현장인 것이다. 하지만 결코 “새마을 정신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거기엔 수 많은 희생과 왜곡의 시간이 있었다”라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다시 한 번 되 짚어 보는 반성의 시간은 아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번 작업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제안하고자 하는 것일까? 작가의 시대비평적 입장이 우리에게 열어 놓은 가능성들은 무엇인가? ‘제안’과 ‘가능성’,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이 번 임민욱 전시에서 찾아야 하는 ‘핵심’이 아닐까 한다. ‘점프 컷’이란 제목이 이러한 탐색을 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임민욱 전시에서 점프 컷은 적어도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된다. 우리 근대사 자체가 점프하고 컷 하면서 전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작가 스스로 이렇게 점프 컷 된 역사를 개인적 경험으로 또 한 번 점프 컷 하면서 작품을 탄생시키고, 이러한 결과들을 통해서 우리가 또 한 번 점프 컷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만일 우리가 점프 컷을 그저 문자 그대로 ‘건너뛰기’의 연속으로, 즉 ‘액션’으로 만 받아들인다면, 이 전시는 우리에게 그다지 흥미로운 여행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점프 컷의 본질은 액션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파장’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기법으로서의 점프 컷의 특징과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점프 컷 기법은 스토리 라인에 종속된 관람객, 연속적 이미지를 따라 강제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관람객의 수동적 태도를 의도적으로 방해 한다. 이 ‘방해’, 즉 ‘계획된 불연속성’은 또 다른 차원의 ‘연쇄작용’을 탄생시킨다. 그래서 관객은 보여지는 것 이면의 시공간을 상상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다. 점프 컷은 시간을 조금 앞당기거나 뒤로 돌리면서 또 공간의 또 다른 측면을 연결시키면서 선적인 흐름의 방향전환을 유도한다. 이 흐름이 살짝 방향을 트는 과정에서 바로 우리의 ‘의식’이 개입하게 된다. 감독이 제안하는 흐름에서 벗어나 또 다른 흐름을 상상하며, 계획된 결말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하고 우리 스스로 ‘이미지’를 완성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수동적 구경꾼이 아닌 이미지를 만드는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이며, 또 다른 시공간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점프 컷은 이 전시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연결 시키며, 사회적 기억을 개인적 경험으로 전환하고, 공공적 이슈를 사적 영역으로 끌어 들일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우리에게 현재의 모순과 갈등에 대한 ‘본질’을 새로운 방식으로 탐색하게 한다. 여기에 임민욱의 점프 컷 전략과 ‘Back to the Future’ 유형의 ‘시나리오’를 연결해 보자. 이것은 전략이 실행될 수 있는 시나리오를 만드는 일이다. 리암 길릭은 Back to the Future와 같은 영화 혹은 유사한 컨셉의 TV 시리즈들에서 우리가 열광하는 것은 주인공이나 그 이야기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과거의 사건들 앞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결말을 그대로 놔둘 것인가, 아니면 사건의 흐름에 개입하여 주인공의 운명을 바꿀 것인가,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실행 할 수 있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즉, ‘미래로 되 돌아가는’ 과정은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병행적 시나리오’를 만드는 일이다. 이것은 근거 없는 몽상과는 다르다. 구체적 현실을 근거로 이와 병행하는 또 다른 ‘현재’를 작동시키기 위한 ‘관계적 장’이다. 이 시나리오는 현재에 대한 변화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현재를 변화시키고 희망을 만드는 ‘주체’는 바로 우리가 되는 것이다. ‘점프 컷’을 작동시키고 ‘미래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의 진정한 전략이 아닐까… 이것은 현실의 모순 그리고 거기서 오는 갈등과 공존하는 또 다른 방식이며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임민욱이 다루고 있는 60년에 이르는 우리의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문화 그리고 정치경제적 문제들이 그냥 문제들로만 남아 있지 않고,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그 어떤 제안과 변화를 가능 하게 한다면, 그것은 ‘지금 여기서’ 우리 스스로 ‘점프 컷’을 실행하고 ‘미래로 돌아가기’의 상상력을 가동시키는 것이다.